--이삭 줍기—-
지난주 일요일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를 접하고도 피치 못하게 산행을 갈 수밖에 없었다. 장마철이라 분명 이런저런 핑계로 산행을 포기할 회원들이 많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집행부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불참의 구실을 대기란 참으로 곤란하였다. 물론 정회원 모두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냈겠지만 평소 않던 전화까지 온 것은 늘 집사람과 동행하기에 내가 참석한다는 것은 두 명이 확보된다는 것이므로 신신당부한 것 같았다.
탑승을 하니 아니다 다를까 평소와는 달리 버스가 텅 비어 탑승인원이 불과 30여 명 정도로 이 산악회가 생긴 10년이래 최고 적은 참석 인원으로 기록되어 버렸다. 그런데 막상 도착을 하니 비가 많이 올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간간히 한두어 방울씩 떨어질 뿐 산행하는 데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누군가 무리하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끌고(?)온 산행이 어려운 한 사람(무릎 환자?)을 제외한 모든 회원이 산행을 하게 되었다.
산행코스는 김천시에 소재한 인현왕후 길 초입에서 출발하여 수도암을 거쳐 청암사 주차장으로 오는 대략 14킬로의 거리였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산행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비가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일회용 비닐 우의를 입자니 더워서 오히려 더 힘들 것 같아 할 수 없이 비상용 우산을 쓰고 산행을 하였다. 비록 세차게 내리는 비는 아닐지라도 자그만 우산으로 비를 전부 피하기는 어려웠다. 몇 시간 지나니 신발이나 양말은 질퍽거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찍 찌직”거리며 등산화 위로 빗물이 삐져나왔다. 게다가 상의나 바지며 온몸이 땀과 비로 죄다 푹 젖어버렸으니 천생 비 맞은 새앙쥐 꼴이 되어버렸다.
청암사를 지나 1킬로 정도 걸으니 드문드문 민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주변 밭에는 개구리 알처럼 올망졸망 달린 아직은 익지 않은 연두색 오미자와 심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과나무 군락 밭을 지나오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밭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밭 전체에 하얀 계란 같은 것이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강에 있는 하얀 자갈을 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여 속으로 ‘도대체 저게 뭘까? 아마 밭에 저렇게 골고루 뿌려져 있는 것을 보니 새로 나온 밭 거름의 한 종류인가?’하며 궁금증을 갖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선은 자연 그 밭쪽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계란 같은 하얀 덩어리 정체는 그 밭에 점점 다가서며 금세 알 수 있었다. 캐고 남은 감자인데 비가 오니까 빗물에 씻겨져 뽀얀 속살을 드러낸 체 내리는 빗줄기에 온몸을 시원스레 샤워라도 하듯 배시시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일부러 골고루 뿌린 것 같이 밭 전체에는 감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수확을 하고 상품성이 떨어져 버려진 것들로 그 크기가 계란 절반 정도의 자그마한 감자들이었다. 함께 동행한 여자회원 가운데 한 분이 ‘에이그 올해 감자 값이 너무 떨어지니까 웬만한 것은 다 버렸네 아까워서 어쩌나 비가 오니 이내 썩을 텐데 쯧쯧쯔…”하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림 감자로 충분히 반찬으로 하고도 남을 정도로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비는 오고 일손도 부족하니 웬만한 것은 저렇게 버릴 수밖에 없는 농부의 심정은 오죽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밭 군데군데 포대에 상품으로 팔려고 담아 놓은 감자가 있었지만 버려진 감자를 다 담으면 아마 그 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아직 캐지 않은 감자 밭도 엄청 많았다. 밭주인은 버려진 감자는 분명 상품가치가 없으니까 나중에 그대로 갈아엎을 것이나 과연 저렇게 많이 버려진 것들을 이삭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마철이라 버려진 감자는 이내 썩을 것이고 이래저래 농부의 마음도 아마 저 버려진 감자 수보다 더 새카맣게 속을 태웠으리라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도 아프고 문득 어릴 적 밭이나 논에서 이삭 줍던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이삭이라 하면 프랑스 화가 ‘밀레(Millet, 1814년 -1875년)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가장 먼저 연상되겠지만 50대 이상은 분명 배고픈 시절의 이삭 줍던 기억이 우선 떠오를 것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즉 1960년 후반이나 70년대 초반까지 학교에서 연례행사처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른 봄이면 식목행사와 송충이 잡기 가을이면 학교 난방을 위해 솔방울 줍기 그리고 보리나 벼 수확이 끝나면 들에 나가 이삭줍기를 하였다. 모든 행사는 방과 후가 아니라 정규수업시간에 선생님과 전교생이 출동하였는데 버려진 감자를 보니 그때 급우들과 함께 이삭 줍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롭게 떠올랐다.
각 반별로 이삭을 주워야 하는 일정한 할당량이 있었으니 놀기 삼아 대충대충 할 수가 없었다. 간혹 게으름을 피우거나 장난을 치며 놀다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혼찌검을 당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체험 농장학습과는 사뭇 차원이 다른 생존이 연관된 것 같은 진지함이 있었다. 그렇게 고사리 손으로 주워 모은 이삭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당시에 보리 이삭이나 나락의 한톨 한톨이라도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아마 대다수의 학생이 집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자식으로 그 소중함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학교에서 시행하는 행사에 나가기도 그 이전 어릴 적부터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이삭줍기를 참 많이도 다녔었다. 주식(主食)인 보리와 쌀은 물론이오 감자, 고구마, 콩, 옥수수, 마늘, 파 등 계절에 따라 이삭 줍는 농작물 종류도 다양하였다. 그 당시는 수확되기가 무섭게 빈 밭이나 논은 으레 많은 사람들이 이삭을 줍기 위해 북적이었으니 이 또한 경쟁이 심하였다. 간간이 이삭을 후하게 남기는 집도 더러 있었지만 때로는 함부로 이삭을 줍다가 주인에게 야단을 맞는 경우도 많았다. 그것은 한번 수확을 한 뒤에 주인이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때로는 주인의 허락을 맡고 난 뒤에 주워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알뜰살뜰 주인이 수확을 하고 나니 이삭 줍는 양이 극히 제한적이라 넓은 밭이나 논을 부지런히 쫓아다녀야 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소작으로 조금씩 하다 보니 농사철이면 땅이 많은 친구 집에 농작물을 수확할 때 거들어주러 간 적이 많았다. 나이가 어리니 품삯이라 할 것도 없고 그저 밥 한끼 배불리 얻어먹으면 그것으로 대만족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농사일 돕는 일손만큼은 친구 부모들로부터 인정받아 자주 불려가서 도와주었고 힘들게 일하고 나면 간혹 집에 가져가라며 그때그때 수확되는 농작물을 조금씩 받아 오곤 하였다. 당연히 이렇게 도와주고 나면 이삭을 줍는 우선권을 확보받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2,3년으로 기억되는데 한번은 농사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사단이 난 적이 있었다. 그날 하교를 하고 집에 오니 고구마를 캐니까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허리도 제대로 펴질 못하고 오후 반나절 가까이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마를 캐면서 괜찮은 몇 개를 다시 파묻고는 흙덩이로 표시를 해두었다. 나중에 이삭을 줍는다는 핑계를 대며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남의 일을 도와주며 이렇게 헤서는 안 된다는 것쯤이야 너무도 잘 알지만 변명이라 해야 될까 그때는 그렇게 양심을 속이는 죄책감보다는 배고픔의 본능이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다.
하지만 친구란 녀석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고구마를 다 캐고 난 뒤였다. 친구가 보란 듯이 여기저기 숨겨놓은 고구마를 들춰내면서 제 어머니께 고자질을 하고 말았으니 몇 시간 동안 뙤약볕에 고생한 노력은 허사가 되어버렸고 오히려 도둑놈이라는 말과 함께 실컷 욕만 얻어먹었다. 게다가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렸으니 저녁에는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으며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만약 그 당시 같았으면 아무리 작은 감자일지라도 저렇게 수확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들 형편이 나아져 그런지 아예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렇다. 이삭 줍기는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 외에 저 밑바닥에는 한국인만의 따스한 정(情)이 깔려 있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때론 일부러 남김으로 함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농경민의 뿌리 깊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고통분담 차원이랄까 이삭이란 매개체를 통하여 사소하지만 그 속에는 서로를 걱정하는 연민의 정이 듬뿍 스며있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이제 이삭 줍는 것을 볼 일도 없을 것이며 어쩌면 이삭 줍기는 영원히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버려진 감자 이삭을 보며 한편으로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혹 세월의 흐름에 나 자신도 저 버려진 감자 수만큼 갈수록 정을 버리고 메말라 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이켜보는 날이 되었다. 아직 캐지 못해 땅속에 묻혀있는 감자같이 이래저래 마음은 찹찹한데 이 놈의 장맛비가 발걸음마저 더욱 더디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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