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세월호--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산악회에서 기획 산행이라 하여 2년마다 주최하는 1박 2일의 산행 겸 여행을 가게 되었다. 2016년 4월3 0일(토) 아침 7시 대구를 출발하여 목포에서 배를 타고 홍도에 도착 깃대봉 산행 후 홍도에서 유람선을 타고 섬 주변을 돌아본 다음 그곳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흑산도에 들렀다가 버스로 섬 일주를 하고 돌아오는 여행코스였다.
출발 당일 아침 7시 다소 설렌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싣고 목포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목포에 다다를 즈음 버스 앞쪽에 앉은 집행부 사람들끼리 무언가 서로 따지는 듯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리 개의치 않았는데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막상 목포항에 버스가 도착했지만 수십 명이 당장 점심을 해결할 식당 조차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과 배편조차도 며칠 전 급하게 겨우 예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 계획했던 일정에 맞춰 승선할 여객선의 좌석이 매진되어 어쩔 수 없이 3시간가량 목포항 터미널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로 인해 일박을 할 장소가 홍도가 아니라 흑산도로 변경되었고 당초 계획했던 모든 일정이 전면 수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여행을 기획한 지가 2년이 되었고 몇 달 전부터는 집행부 및 산악회 정회원들이 모여 수 차례 회의를 했는데 식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배편마저도 며칠 전에 급하게 예약을 했다는 말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물론 계획했던 일정이 아무런 차질이 없다면야 모르겠으나 전면 수정이라는 말을 목포에 도착하여 통보받았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집행부 대여섯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식당이 정해지는 한 시간 반 동안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앉아 쉴 곳도 없는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삼삼오오 모여 불만을 토로하니 조용했던 포구는 집행부 성토 장으로 돌변하였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서로 책임을 두고 얼굴을 붉혀가며 언성을 높이니 시장 통 같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집행부에서는 명확한 설명도 없이 쉬쉬하며 대충 얼버무려 서둘러 봉합하려는 눈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기대감을 안고 출발한 여행길이 다소 언짢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서로서로 이해하며 기분 좋게 가자고 하는 분위기라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홍도가 되었건 흑산도가 되었건 배를 탈 수 있는 것 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위안을 삼는 눈치였다. 물론 이후에도 일부 회원은 집행부를 강하게 성토하였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미리미리 확인하지 못한 집행부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야?”며 거친 말도 서슴지 않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고 어렵게 성사시킨 여행이니만큼 이쯤에서 그만하고 분위기를 더 이상 망치지 않도록 서로 입단속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모든 것을 배 출항 시간에 맞춰야 하니 홍도의 깃대봉 산행은 자연 취소되었고 저녁에 흑산도에 도착하여 특별한 일정 없이 일박을 한 뒤 다음날 아침 버스로 흑산도를 일주하고 홍도에 도착 유람선으로 섬을 한 바퀴 돈 뒤 저녁에 목포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목포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오침을 하며 승선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4시 목포에서 여객선에 승선을 하는데 여행 중 꼭 이런 사람이 한 명 있듯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은 분이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즉시 제 증명서를 즉시 발급받을 수 있어 다행히 승선하는 데는 그리 문제 되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역시 IT 강국의 대한민국이라는 것과 승선(乘船) 시 이제는 신분확인이 철저히 이뤄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흑산도를 향해 목포항을 출항한지 얼마 후 뒤편에서 일행 중 한 분이”어 나는 왜 남자인데 여자로 표기되어 있지?”라는 말이 들렸지만 ‘단순한 오타이거나 행적적 착오이겠지’하며 여행 분위기에 들떠 그 말을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두 시간 반 정도 뱃길을 달려 일몰이 시작될 즈음 흑산도 항에 도착하니 항구에는 사십 대 후반 정도의 남자 가이드(guide)가 팻말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로 향하기 위해 항구 한쪽 편에 집결해 있는데 가이드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니 남자는 아홉 명으로 통보를 받았는데 왜 이렇게 많지’하며 의아해하였다.
우리 일행은 전체 44명으로 여자 23명 남자 21명이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열명 이상이나 차이가 나니 한편으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처음 출발부터 삐걱거렸으니 ‘현 집행부에서 하는 일이 뭐 다 그렇지’하며 뭐라고 어필하기보다는 이제는 될 대로 되겠지 하며 아예 기대를 접었다. 갑작스레 남녀 인원이 달라졌으니 숙소가 다시 정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임시거처에 머물렀다.
사실 부부동반을 한 일행이 나를 포함 한 쌍이 더 있었다. 물론 부부라 해서 따로 방을 배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남녀가 따로 숙박을 해야 하는데 남자 숙소가 문제가 된 것이다. 화장실도 하나인 데다 아홉 명이 잘 공간에 이십여 명이 짐을 풀고 있으니 참 가관이었다. 남녀 구분에 대한 인원 통보 차도 제대로 되질 않아 여행 성수기에 숙소를 다시 잡고 방 배정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런저런 잡음이 계속 끊이지 않았지만 저녁에 모두 모여 술 한잔하면서 조금씩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자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좋게 좋게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관광버스로 두 시간 가까이 운전기사 분으로부터 흑산도의 역사적 유래와 전설 등등을 들으며 사진도 찍고 풍광도 구경하며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이 넉살스런 기사 분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안내를 하였는지 여유가 넘쳐흘렀고 구수한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능청맞은 익살과 경지에 이른 듯한 입담은 여행을 한층 더 감칠맛 나게 하였다.
항구에 도착하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넘쳐났고 잠시 휴식과 함께 버스 운전 기사 분이 추천한 갖은 한약재를 넣어 빚었기에 뒤끝이 깔끔하다는 흑산도 특산품인 보리 막걸리 두 통을 사고는 홍도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여독(旅毒) 탓인지 뱃멀미인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함이 밀려와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생각하고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무심코 들고 있던 승선권을 확인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승선권에는 이름은 분명 내 이름인데 성별이 다른 것은 물론이오 생년월일도 나와는 전혀 무관한 날짜가 적혀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며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행 분들의 승선표를 확인해 보니 남자 일행의 열명 정도가 나처럼 성별과 생년월일이 달랐던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우리 일행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나의 승선권에 표기된 생년월일과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도대체 성별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누구의 생년월일을 임의로 기입해 놓은 것인지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가볍게 넘어갔던 모든 일들이 퍼즐 조각 맞아 들어가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목포에서 흑산도행 여객선을 탈 때 일행 중 한 분이 성별이 바뀌었다고 했던 말과 흑산도에서 도착했을 때 가이드가 통보받은 남, 여 인원 수가 달라 그로 인해 숙소를 다시 찾는 등 소동이 발생된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나는 분명 이 배에 타고 있지만 유령 승객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만약 무슨 사고가 발생된다면 어떻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까? 승선권 소지자와 탑승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는 무엇 때문에 철저히 해야 하는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아닌가? 기본 중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확인하지도 않을 신분증은 왜 보여달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제일 중요한 승선 절차가 그저 형식에 불과하다는 현실 앞에 뭔지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세월호 참사 때 탑승객 숫자는 물론이오 신원이 파악이 잘 안 되어 발표 때마다 오락가락했던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니었던가
유람선을 타고 홍도를 한 바퀴 돈 다음 선착장에서 목포행 여객선을 기다리며 승선표와 신분증 확인 절차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있을 수 없는 이 상황을 지레짐작만 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짚어볼 필요성을 느꼈다. 과연 개찰구 직원들이 신분증 확인을 하는지 제대로 검증을 해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친분이 있는 일행 중 여자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승선 시 신분증을 서로 바뀌어 제시했을 때 과연 제지를 하는지 확인해 보자고 하였다. 처음에는 다소 망설이더니 이내 흔쾌히 동의하여 신분증을 서로 바꿔 개찰구를 통과해 보기로 하였다. 승선표에 표기된 성별과 생년월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분증 사진은 누구든 곁눈질만 슬쩍 해도 남녀 구분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차이가 났다.
목포행 여객선이 도착하고 승선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앞을 보니 개찰 직원 바로 옆에는 해경이 두 명 서 있었다. 먼저 앞장을 섰고 만일을 대비해 신분증을 바꾼 여자분은 바로 뒤에 따라오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승선을 제지당하여 조금 전까지 우려했던 일들이 제발 아니기를 하는 바램이 컸다. 차례가 되어 승선표와 신분증을 보이며 일부러 사진이 잘 보이도록 내밀었으나 그대로 통과되어 혹시나 하여 한번 더 내밀었으나 개찰구 직원은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물론 뒤따라 온 여자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랬다 개찰 직원들의 확인사항은 누구의 신분증인지 또 승선표에 기입된 성별과 생년월일 등은 관심대상 밖이었고 오로지 무임 승선하는 승객이 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 목적이었다. 한마디로 승선표만 제대로 끊으면 즉 돈만 제대로 내고 타면 승선 절차에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었고 신분증은 보는 척 시늉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확인하지도 않고 형식적인 절차를 하면서 왜 굳이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하며 해경은 왜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개찰구 통과 후 바로 옆에 서 있는 해경에게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고 강력히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승선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로 인해 출항이 늦어지거나 승선거부를 당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같이 여행을 떠난 일행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꾹 참고 뭍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 2주기가 얼마 전에 지났다. 이 사고 직후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사과와 함께 한 점 의혹이 없이 철저히 사건의 진상을 파헤침은 물론 관련 책임자 처벌과 재발방지를 위한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고 공언(公言)하였다. 또 각종 비리의 온상이라는 해경은 즉시 해체하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모든 제도적 보완은 물론이오 차후 민관(民官), 관관(官官)의 부정부패 연결고리를 차단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아울러 대형참사나 재난 발생 시 이를 진두 지휘할 컨트롤 타워(a control tower)인 국가안전처를 신설하는 등 아픔을 치유하고 머지않아 안전한 대한민국이 새롭게 펼치게 될 것처럼 발표하였다.
하지만 과연 2년이 지난 지금 그 어떤 약속이 지켜졌으며 대한민국은 사고로부터 얼마나 안전한 나라로 바뀌었는가? 결과적으로 보자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세월호 참사에 책임지고 처벌된 공직자는 단 한 명도 없을뿐더러 모든 것은 공언(空言)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작년 전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든 메르스 사태 시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우리 모두는 잘 기억하고 있다. 대형 참사나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진실을 알리고 재발방지에 힘쓰기보다는 이를 축소 은폐시키기에 급급했으니 갈수록 정부에 대한 불신만 더 커졌을 뿐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고도 마찬가지다. 초기에 유족들이 진상조사를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사건 발생이 5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진상규명을 한답시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게다가 정치권에서는 또다시 정부의 컨트롤 타워의 부재를 거론하며 질타하고 있으나 초록은 동색일 뿐이다. 이렇듯 정부의 뒷북치는 듯한 늑장대응은 어제 늘 일이 아니었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똑 같이 되풀이하며 반복할 것인가? 그러니 오히려 사회 곳곳은 안전불감증만 한층 더 깊어졌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총체적인 전 방위 비리와 관리 부실 및 정부의 위기관리 미숙에 대한 것이 도마 위에 올랐고 언론은 몇 달 동안 이에 대해 연일 방송을 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사고 직후 발표했던 공약에 전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국민들 뇌리 속에 어쩌면 하루빨리 지워지기를 바랬을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의 책임과 약속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세모그룸의 총수인 유벙언 한 사람에게 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형국으로 몰아갔다. 몇 달 후 그가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아니다 다를까 사건의 모든 책임을 유명언과 세월호 선장 및 선원 몇 명에게만 멍에를 지우고 수 없이 쏟아 내었던 약속들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의혹과 진실 그리고 책임과 대책은 망각의 진도 앞바다에 그렇게 깊숙이 잠가버렸다.
안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는 이렇게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잊혀졌으니 앞으로도 바뀔 것도 바뀔 것이란 희망도 사라진 것이다. 물론 정부만을 탓할 노릇은 아닌 것이 우리 어른들은 어른이란 이름으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무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차디찬 바다에 묻고서도 과연 아픔을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가? 사회 곳곳에 만연된 안전불감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책도 있어야겠지만 ‘나는 과연 얼마나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에 대한 스스로 물음에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며 그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충실히 이행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또 다른 대형 사고가 도사리고 있는 안전불감증이 만연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나라 기본이 철저히 무시되는 이 땅에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확신하며 또 사회 구성원으로 각자의 책임을 다해가는 그날은 과연 언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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