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박카스--
사무실이 있는 동네는 대구 도심에서 조금 비껴 난 외곽지로 행정구역상 서구 상리 1동이지만 새방골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와룡산 끝자락에 자리하여 300여 가구가 산바람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한갓지게 정을 나누는 마을이다. 사무실 바로 앞에는 법왕사란 절이 있어 간혹 찬불가(讚佛歌)를 잔잔한 경음악으로 틀어주니 망중한(忙中閑)을 만끽할 수 있어 찌든 심신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찰 우측에는 금년(2016년)에 이전한 대구의 명문고인 계성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2층 사무실에서 바라보면 운동장이 일부분 보이는데 전에 없이 학생들의 웃음과 재잘대는 소리 또 빠른 비트(beat)의 최신 음악 일색인 교내 음악방송은 한적하고 소음에 면역력이 약한 새방골을 간혹 들쑤셔 뒤적이기도 한다. 하지만 차가운 사이다 뚜껑을 따는 듯한 청량함과 고무공 튀는 듯한 약동감 그리고 빛바랜 사진을 들척이듯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니 가끔은 그 모습이 아련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많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하지만 이 곳은 요즈음 일컫는 인위적인 슬로우 시티(Slow City)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슬로우 마을( Slowa a village)이다. 새방골의 시계는 참으로 게으르다 못해 때로는 자주 깊은 수면에 빠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간이 멈춰진 곳이다. 시계 바늘을 주민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시계가 주민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변화를 강하게 거부하는 것 같다. 동네 곳곳을 돌아보면 어머니의 팔베개 같은 아늑함도 있는 반면 도심의 풍요(豊饒)에 뒤처지거나 낙오된 사람들의 안식처 혹은 도피처 같은 곳으로 손길이 잦지 않아 가난이 곳곳에 배여 낙후된 마을로 애잔함이 물씬 느껴지는 동네이기도 하다.
회사 업무 특성상 창고에서 라면 박스보다 조금 큰 빈 박스(BOX)가 나올 때가 더러 있다. 처음에는 창고 바로 옆 전봇대에 두면 누군가 금세 가져갔기에 생길 때마다 별생각 없이 늘상 그곳에 두었다.
아마 오륙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 날은 빈 박스 양이 제법 되었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런데 전봇대 바로 옆에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는 내가 하는 모습을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지그시 지켜보는 것이었다. 의당 빈 박스를 가져가시려나 생각은 했지만 한편으로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니 이 많은 양을 어떻게 가져가시려나 하고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시다 빈 박스가 계속 나오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앞서 던져놓은 박스를 옆에서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먼저 박스 하단부에 접착테이프가 붙은 곳을 뜯어내고 옆으로 좌악 펴서는 한쪽에 가지런히 쌓으시며 누구에겐가 빨리 오라고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빈 박스를 다 내놓을 즈음 70대 후반의 할아버지 한 분이 작은 손수레를 끌며 오셨다. 전화를 받고 다급히 오셨는지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다소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헐떡이셨다. 아마 부부로 짐작되었고 할아버지는 오시자마자 아무 말없이 할머니와 함께 박스를 빠른 손길로 정리하셨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며 괜스레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박스를 다 내어 놓고는 2층에 있는 사무실로 곧장 올라가려다 무엇에 이끌린 듯 창고에서 커트 칼을 갖고 와서 두 분이 쉽게 정리하시도록 접착테이프를 잘라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에그 그만둬요 박스 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우리가 알아서 할게 그냥 가세요” 하며 애써 만류하셨지만 이미 마음먹은 데다 그냥 도와드리고 싶었다. 웃으면서 “괜찮아요 할머니 손으로 뜯는 것보다는 이게 빠르고 쉬워요 제가 칼로 테이프를 자를 테니 쌓기만 하세요” 하며 일손을 멈추지 않으니 더 이상 말리시지는 않았다. 힘이 부치셨는지 잠시 손을 멈추고 넋두리 반 푸념 반으로 “에이그 내가 다리가 이리 많이 아프니 할부지를 도와주고 싶어도 이런 것 밖에는 할 수 없어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오”하시며 옆에 있는 전봇대가 쓰러질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안쓰러움과 괜한 비밀을 엿들은 듯한 멋쩍음 때문에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할머니 어디 여기 가까이에 사시는가 봐요?” 하니까 “저쪽 안쪽 골목에 사는데 할부지 혼자 고생시키는 것 같아 나는 도와줄 요량으로 동네를 돌며 빈 박스나 파지(破紙)가 있으면 가까운 곳에 모아두었다 할부지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오” “참 이 놈의 나이가 웬수지요” 하시면 또다시 엷은 한숨을 내시니 다시 분위기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걸면 괜히 아픈 곳을 자꾸 건드리는 것 같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박스가 다 정리가 되는 동안 잠시이지만 여러 생각을 하였고 마무리하며 끈으로 묶고 가실 즈음 할머니께 “할머니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그럼 앞으로는 제가 박스를 창고에 모았다가 버릴 때 할머니께 전화를 드릴 테니 그때 오셔서 가져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하니까 살짝 굽은 허리를 힘들게 펴시고는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그렇게 해주시면 우리는 고맙기는 하지만 아저씨가 번거롭지는 않겠어요” 하시기에 “괜찮습니다. 저야 어차피 버리는 것이고 여태껏 그때그때 버렸지만 이제는 창고에 모았다가 오늘처럼 한꺼번에 버리면서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되니까 별 상관없습니다.”하니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성함을 모르기에 그냥 ‘파지 할머니’로 저장을 해놓았다.
이 동네에는 아직 빈촌이라 파지를 모으는 어르신들이 깨나 있었다. 특히 길 건너 바로 옆집에는 육십 대 중반의 자그만 키의 아주머니가 파지를 모아 파는 분이 있었다. 아직은 싱싱한 다리로 온 동네를 부지런히 휘젓고 다니시니 기동성은 물론이오 체력적인 측면 등 다른 어르신들과는 경쟁력에 있어서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 그러니 달리 표현하자면 블랙홀 같이 동네 파지를 쭉쭉 빨아들이듯 주워 모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처럼 그 아주머니가 지나고 나면 주변 파지가 지남철에 붙어 따라다닐 정도로 싹쓸이하시니 걸음걸이도 힘도 약하신 다른 어르신들은 상대적으로 파지를 구하기가 그만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근에 고물상이 있는데 보통 어르신들은 파지가 어느 정도 모이면 손수레나 리어카에 잔뜩 싣고는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듯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동네 곳곳을 누비니 하루에 모으는 파지 양이 만만치 않아 한 달에 두어 번 대형 집게차량이 와서 넘칠 듯 싣고 가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파지 수집량이나 거래량으로 비교하자면 대기업과 소상공인같이 당최 경쟁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간혹 빈 박스가 많을 때는 아예 그 아주머니 집 담 너머로 버리기도 했는데 오늘 이 노부부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이분들께 연민이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 이후 빈 박스를 창고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창고가 그리 큰 편이 아니어서 따로 공관을 내어 빈 박스를 모으는 일이 다소 성가시고 귀찮은 면도 있었지만 그분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양이될 때까지 모아 두었다. 박스 쌓는 공간이 비좁기 시작하면 할머니께 전화하여 박스를 내어 주었고 그때마다 정리하기 쉽게 박스 하단부에 붙어 있는 접착테이프를 커트 칼로 자르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 되었다.
그렇게 빈 박스를 몇 차례 창고에서 내어 주던 어느 날 손수레에 박스를 가득 싣고 가시는 뒤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는 사무실에 올라왔는데 얼마 후 1층 창고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내려갔더니 할머니였다. 그런데 다짜고짜 한쪽 손에 든 검정 비닐봉투를 내게 건네며 “아저씨 너무 고맙습니다. 이거 별 것 아니지만 이 할미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받아줘요” 하시며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손에 쥐어 주고는 뒤돌아 가시는 것이다. ‘이게 뭐지?’ 하고 봉투 안을 보니 박카스 4병이 들어 있었다. 순간 ‘아! 이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곧장 할머니께 다가가 “할머니 제가 조금이라도 이런 것을 바라고 박스를 드린 것도 아니지만 파지 팔아 대체 돈이 얼마 된다고 이런 것을 사 오십니까? 음료수는 우리 사무실에도 많으니까 이렇게 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갖고 가셔서 할아버지와 함께 드세요” 하며 다시 할머니께 드리려고 하니까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애원을 하듯 “우리는 아저씨가 고마워서 그런 것이니 그냥 받아 둬요 물론 얼마 안 되지만 야속하다 말고 이 할미의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 주시면 안 되겠어요” 하시며 두 손을 꼬옥 잡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분명 이러면 안 되는데 할머니가 두 손을 놓지 않고 울먹이듯 애원하며 계속 내 눈을 바라보니 다시 드릴 수도 그렇다고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소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분들이 어떻게 하루하루 파지를 모으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받자니 힘들게 파지를 모으시는 모습이 어른거려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자그만 눈은 이미 촉촉이 젖어있어 받지 않겠다 또다시 거절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실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여기까지 사 들고 온 할머니의 정성을 더 이상 무시하기는 어려운 입장이 되어버렸다. 잠시 멈칫하고 있으니 할머니는 손을 슬그머니 빼시며 “귀찮을 텐데 일부러 모아서 전화까지 주니 너무 고마워서 그러니 그냥 받아줘요” 하시고는 맞잡은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서시기에 이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서는 할머니를 다시 잡고는”할머니 그럼 제가 두 병만 받을게요 두 병은 할아버지하고 나눠 드세요 그리고 저하고 약속을 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만약 어떤 것이라도 사 오시면 안 받는 것은 물론이지만 다시는 전화를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아셨죠 꼭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가 두 병만 감사히 받을게요” 하니까 그제야 미소를 띠시며 “그래요 그럼 알았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것이라도 그냥 받아 줘요 이 할미의 마음이라오” 하며 약속 또 약속을 하며 뒤돌아 가셨다.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매일 성치 않는 몸으로 파지를 모으시는데 부모님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음료수를 사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할머니께 받고 나니 찹찹할 뿐이었다. 꼭 부정한 짓을 하여 받은 뇌물 같은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무실 냉장고에 넣으면서 ‘끝까지 못 받겠다고 돌려주었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하며 이게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머릿속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어찌 되었건 지금까지 계속 빈 박스가 쌓이면 전화하여 그 노부부께 드리는 일이 반복되었고 2년 전쯤인가 또 한 번 박카스를 사 들고 오셨지만 그때는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는 내 마음을 확실히 아셨는지 두 번 다시 음료수를 사 오시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올봄이었다. 역시 빈 박스 때문에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고는 같이 정리를 하는데 정리가 다 끝나도록 할아버지가 오시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할아버지가 바쁘신지 많이 늦네요” 하니 “이그 나이 앞에 장사(壯士) 있겠소 할부지가 보름 전부터 많이 아파 병원에 계신다오” 하시며 혀를 끌끌 차시는 것이었다.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갑자기 시골에 계신 올해 구순이 되시는 연로하신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었다.”할머니 그럼 이 박스를 이제 어떻게 옮기시려구요?” 하니 “조금 있으면 내 친구가 올 거요 할부지가 병원에 가시고 난 뒤 그 친구가 도와주고 있는데…”라고 채 말씀이 끝나기 전에 골목에서 손수레를 끌고 한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친구란 분도 여든이 다되어가는 노인으로 걸음걸음이 무척 힘들어하셨다. 박스가 정리된 다음 원하시는 곳까지 옮겨 드리려고 하니 정색을 하며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이었다. 거래처에 가려고 새방골 입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옆 작년에 건물을 새로 지어 생긴 대형 마트(mart) 앞에 서 계시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차장(車窓)을 열고 가볍게 웃음으로 눈인사를 하였다. 속으로 ‘지나다니며 마트에서 빈 박스가 제법 배출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 때문에 오셨는가?’ 하고는 전방을 응시하며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파란 신호등이 켜졌고 대기하고 있던 앞 차량이 움직이자 이내 출발을 하려고 가속페달을 밟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할머니가 부채질하듯 손짓하며 다급히 나를 부르며 늦은 걸음으로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할머니 양손에 들고 있는 박카스 두 병을 보았지만 그냥 못 본체 하며 차를 몰고 큰 도로로 나왔다. 몇 초라고 하기도 힘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이드 미러(side mirror)로 할머니를 보니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다 휙 가버리니까 한쪽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이 내 쪽을 계속 응시하는 모습을 보며 지나쳤다.
그러나 그 모습이 계속 실루엣으로 남아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차라리 박카스를 받든 안 받든 차를 한쪽 편에 주차해 놓고 ‘이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출발했어야 하는 것이 옳았는지 아니면 그때 행동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판단이 서질 않지만 하루 종일 할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리며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였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니 손에 들고 계셨던 박카스 두 병은 금전적인 측면을 떠나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한국인만의 정(情) 그 자체였는데 그걸 무시한 것만 같아 마음이 심란하였다. 결과적으로 할머니의 간곡한 정(情)을 매정하게 뿌리쳤으니 이 때문에 혹 할머니가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며칠 동안 생각한 결론은 혹 다음에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마트에 모시고 함께 가서 음료수이든 과일이든 자그만 것이라도 원하시는 것을 하나 사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그나마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내가 사는 동네이건 사무실 동네이건 어디든 파지를 주워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분들이 있다. 자주 보던 분들이 한동안 뵈질 않고 낯선 분들이 보일 때가 더러 있다. 시간이 지나 풍문으로 들으면 필경 십중팔구 노환으로 병원이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풍경 속에 관계나 관심의 유무를 떠나 어떤 사람은 주변에서 영원히 등장하지 못하고 그림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 제각기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셨던 분들이며 나 또한 언젠가는 이젤(easel)의 화폭(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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