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 못하는 사회---
얼마 전의 일이었다. 편도 4차선의 넓은 대로(大路)인 네거리 교차로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차도 좌회전 신호등이 켜졌다. 그런데 그 차선의 선두 차량이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출발을 하지 않으니 뒤에서 줄줄이 기다리던 차량 중 몇 대가 경적을 울려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두 차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근거리(至近距離)라 혹시 운전자에게 무슨 일이 있나 하여 유심히 보니 그 운전자는 사이드미러(side mirror)와 룸미러(room mirror)를 번갈아 가며 힐끗힐끗 살펴보면서도 도무지 출발할 생각을 않는 것이다. 분명 신호가 바뀌었음을 그 운전자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잠시 후 성격 급한 후미차량 중 한대가 옆으로 급히 차선을 변경하여 선두 차량 바로 옆에 정차해 차창을 열고는 선두 운전자에게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설을 몇 차례 퍼부었다. 하지만 그 운전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전방만 응시한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였다.
그쯤 되자 후미에 줄지어 있던 차량들이 신경질적으로 일제히 경적을 마구마구 울려대니 교차로 주변이 무슨 난리통 같았다.’아니 빨리 차를 출발시키면 될 텐데 왜 저러고 있지?’하며 한편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누구든 운전하면서 잠시 딴생각을 하거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이런 경우를 가끔 겪지만 후미차량이 경적을 울리면 응당 곧바로 출발하는 것이 통상적인데 왜 저러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니 신호 대기하고 있던 여러 차량이 동시에 계속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교차로 주변을 짜증으로 뒤덮었고 자연 교차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선두 차량으로 쏠렸다. 그 와중에 잠시 후 신호등이 황색 신호로 바뀌자마자 그 차량은 갑자기 굉음을 내며 급하게 교차로를 벗어났다. 마치 자동차 경주의 출발 장면을 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내 적색신호로 바뀌었으니 그 선두 차량 외에는 단 한대도 교차로 진입 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제야 그 선두 차량이 왜 그랬는지 감(感)이 잡혔다.
처음에 신호가 바뀌자마자 후미차량이 한대가 경적을 울려대니 다소 짜증 났을 것이다. 그리다 이내 여러 차량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니 ‘그래 출발이 조금 늦었다고 신경질적으로 마구 경적을 울렸지 그 때문에 지금 기분이 몹시 상해졌어 흥! 그래 어디 두고 보자 그렇다고 너희들 뜻대로 바로 출발할 것 같으냐? 너희들을 기필코 응징하여 골탕을 먹이고야 말리라’라는 못된 심보였던 같았다. 그래서 그 운전자가 생각해 낸 것이 조금 전에 본 것처럼 본인만 교차로를 벗어나고 다른 차량들은 꼼짝 못하고 서 있게 하는 치졸한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요즘 도로에서 보복운전이 너무 빈번히 발생하고 그 자체가 인명피해는 물론이오 대형 교통사고로까지 이어지니 형사 처벌로 강력히 다스리겠다며 경고성 홍보를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뉴스 단골 메뉴로 오르는 것을 보면 효과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비록 보복심리로 다른 차량을 골탕 먹인 선두 차량 운전자의 잘못이 분명 크다고는 하나 잘잘못을 따지고 보면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단 일초도 기다려 주지 못하고 경적을 울려대는 후미차량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왜 이럴까? 꼭 교통문화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인의 실수나 작은 잘못조차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조그만 일에도 날 선 각을 세우며 첨예하게 대립적 관계로 변해갈까?
조금 전의 목격한 상황을 도로에서 흔히 일어나는 단순한 보복운전으로 치부할 성격만은 아닌 것은 최근 TV 뉴스를 보면 살인이나 폭행사건 등이 끊이지 않고 연일 보도된다. 이렇게 잔혹한 범죄가 너무도 빈번히 발생하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무감각 상태로 가볍게 넘기는 것은 생명 존엄성에 대해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인명 경시 풍조와 도덕적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극도로 예민해져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조급증에 걸려 기다리고 인내하며 한번 더 생각하는 과정은 생략된 채 빨리빨리 결과를 돌출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이는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랑도 명예도 인간관계도 속전속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목적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분풀이나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물론 무한경쟁시대이니 뒤쳐지면 곧 낙오자, 패배자로 전락될 것 같은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어야만 살아날 수 있는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인한 피로도가 겹쳐 자신을 간수하기도 급급하여 주변을 세심히 돌아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극도의 개인주의 사고로 치닫는 현상은 개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부정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누적되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이라 판단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 양보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보다는 자신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기분이 조금이라도 언짢거나 거슬리기라도 하면 참지 못하고 순식간에 폭발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의 관계는 실종된 지 오래며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거나 반대 의견을 갖는 사람은 곧바로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가 대립적 구도로 변해가는 데는 분명 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다. 물론 심리전문가나 사회 분석학 전문가가 아니니 그 요인들을 일일이 세부화 혹은 구체화하여 거론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 요인을 들어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가 사회 전반에 걸친 무개념과 부정부패일 것이다.
통치자부터 위정자(爲政者), 고위 공직자는 물론이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조금이라도 권력을 쥐고 있는 지도계층 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 부(富)를 축적하고 있는 계층의 철학의 부재(不在)와 도덕적 해이(解弛)다. 이념이 철학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이 시대의 지도 계층에게 무슨 정신적 멘토(mentor) 역을 기대할 수 있으랴? 국민을 무지렁이로 치부하고 위기가 오면 이념을 들먹이며 존립에 목숨을 거는 철학 실종시대에 무개념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어떻게든 자리를 유지 보존하고자 괜한 이념을 들먹이며 여론을 조장하여 정권에 빌붙어 기생(寄生)하거나 기득권 세력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아예 철학의 숭고함을 매장(埋葬) 시켜버리는 것이다.
인본주의에 기반한 철학을 갖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는 슬픈 현실 속에 누구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또 가진 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음은 물론이오 인간의 존엄성까지 권력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오판하니 둔갑된 철학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무개념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인간성을 거론하기에는 너무나 각박해진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 같다.
간혹 국회 청문회를 보면 질문 과정에 꼭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병역문제, 위장전입, 탈루와 탈세, 부동산 투기, 이중국적문제, 논문게재 등에 대해 여태껏 단 한 명도 이 문제에 관해 자유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상대적으로 덜하고 더하고의 차이를 두고 저울질하며 웬만하면 대충 덮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대상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질문하는 국회의원들도 대상자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오십보백보이니 초록은 동색인 것이다. 그러니 불감증이 뼛속 깊이까지 물든 이들이 서로의 이득을 적당히 챙기면서 은밀한 밀실 거래로 그들만의 잣대로 가부(可否)를 결정한다. 그러니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이 시선이나 여론은 안중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대충 얼버무려서 선출된 자가 자신의 잘못은 도외시한 채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니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어느 정도이지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로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국민들에게 대놓고 기득권층의 이 정도의 부정(不正)과 비리(非理)는 그들만의 전유물이라 대수로울 것이 없다며 대놓고 광고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 있지만 똥 묻은 개가 돌아다니며 겨도 묻지 않은 깨끗한 개에게 똥을 묻히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시대에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는 위정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현실은 조선시대의 망국(亡國)의 근원이라는 당파 간 당쟁은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그 끝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니 당연시 되어야 할 청백리(淸白吏)가 천연기념물 같이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며 조금의 미담이나 선행이 사회의 큰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청백리라 일컫는 태국의 잠롱(잠롱 스리무앙) 시장 (방콩 시장1985-1992) 같이 청빈한 생활을 하며 부정부패를 척결에 앞장을 서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 존경받는 위정자가 우리나라에는 왜 없는 것일까? 외국에서 유능한 스포츠 감독을 영입하듯 이제는 청백리도 외국에서 영입을 해야만 되는 것 아닌가? 미래를 생각하며 국민을 국민답게 위하고 희망을 주는 위정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지만 잠롱시장 같은 지도자가 어디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 참으로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둘째는 공평과 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몇 년 전 ‘변호사’란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인기리에 상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의 변호사 역으로 나온 배우 송강호 씨가 법정을 향해 울분을 토하며 한 말이 바로 헌법 제1조 2항이다.
헌법 제1조 1항(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과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이 조항대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주인임을 자부하고 공정한 민주사회란 것을 확신하며 신뢰하는 국민이 몇 퍼센트나 될까?
권력과 금권(金權)을 가진 기득권층에게는 법이라는 것이 동네 마트(mart)의 물건처럼 언제든지 입맛대로 편리하게 사용하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유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민들은 법이 있어 보호되는 측면보다는 법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산다.
지도층이나 기득권층이 자행하는 탈법, 불법, 편법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확신하는 국민은 분명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진 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없는 자에게는 냉혹하리만큼 가혹한 것이 법인데 어찌 공평하다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여전히 무전유죄(無錢宥罪 ) 유전무죄(有錢無罪)가 통하는 굴절된 사회임을 국민들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렇듯 국가가 법 앞에서 공평성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회에 있어서 공정성마저 형평성을 잃은 지 오래다. ‘개천에 용이 난다’는 속담은 이미 옛말이 되고 말았다.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한답시고 이미 출발선도 다르고 두발도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질주의 도구를 달리한다면 누가 이를 공정한 게임이라 할 것인가?
이렇게 기회의 균등 마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개천에 용이 날 수 있을까? 그저 개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미꾸라지 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다. 두 발만 믿고 뛰어 어떻게 이토록 불공정한 경주에서 승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대부분의 기회를 기득권층만의 점유물로 착각하고 그들만이 영원히 독점 및 독식하기 때문이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이 사회 분위기가 과연 미래를 짊어지고 갈 젊은 세대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이미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삼포(연애, 결혼, 출산포기)에 오포(삼포+인간관계, 자택 마련 포기) 이제 칠포(오포+취업, 희망포기)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것은 충분히 예견된 현상이 아니겠는가?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가 저지르고 있는 작태 앞에 도저히 허물 수 없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시작도 하기도 전에 좌절의 쓰디쓴 맛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회조차 박탈 당해 희망이 송두리째 사라진 현실 앞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의당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희망은 어디에서 나오며 밝은 미래를 설계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꿈은 이뤄진다고 믿는 사회는 도대체 언제 올 것인가?
셋째는 방송과 언론의 행태이다.
방송과 언론의 뉴스 보도가 정권의 눈치를 보며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고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였지만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싶다. 다만 사건사고를 보도하면서 최근에는 여러 패널리스트(panelist)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한 사건을 두고 각자의 의견을 내놓으며 진행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을 보다 심층 분석한다는 명분 아래 다소 흥미위주로 진행하는 느낌을 받는다. 유사 사건들이 계속 재발되는 상황에서 ‘이런 사건들이 왜 끊임없이 반복해서 발생할까?’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사건 예방을 위해 제도적 보완점이나 방송과 언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은 없는지? 개선방향은 무엇인지? 등등 재발방지를 위해 대안을 제시해야 함에도 그저 가벼운 가십거리로 치부하는 것만 같다. 우리 사회가 최근에 왜 이렇게 흉악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되는지 사회 흐름에 대해 방향을 정확히 진단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주도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하나는 프로그램이 편성이나 주제 반영에 대한 것이다. 요즘 예능(연예 오락프로그램)과 드라마 천국이라고 할 만큼 때로는 수많은 TV 채널이 동시간에 예능과 드라마로 도배를 하고 그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 갈수록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 다양성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니 당연히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야 하고 많은 장르의 콘텐츠(contents) 개발이 당연한 흐름이기도 할 것이다. 또 이로 인해 관련 분야가 더불어 발전할 수 있으며 일자리 창출과 수출을 통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등 여러 긍정적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시청률 경쟁에만 목매어 말초신경만의 자극을 극대화하려다 보니 드라마의 내용이 막장을 넘어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훈훈한 인간미가 물씬 묻어나거나 애틋한 정과 사랑이 듬뿍한 내용보다는 남녀 간의 불륜이나 가족간 의 패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막장드라마가 대다수로 드라마 내용과 유사하게 이 사회가 막장에서 끝장으로 치닫는 듯하다.
예능 프로그램도 소재도 무척이나 다양해졌다. 물론 급변하는 시대상을 빠르게 반영하기에 어쩔 수가 없다고는 하지만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재미에 재미를 더한다는 구실 아래 온갖 방법을 무분별하게 총동원하는 것 같다.
모두 거론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예를 들면 예능프로그램 중 벌칙을 정하는 방법으로 복불복이란 게임이란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에 엄청난 차별을 둔다. 물론 재미로 하는 것이니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가 갈수록 도가 지나칠 정도로 심해지는 것 같다. 시청자의 요구인지 대리만족을 최대화시키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로 인한 부정적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 사회가 피땀을 흘린 노력하는 이들에게 정당한 댓가가 보장되는 사회라기보다는 복불복 게임같이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허황된 꿈을 꾸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수밖에 없다. 노력은 않고 사기나 도박, 절도행각을 통하여 손쉽게 돈을 버려는 한탕주의 범죄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과 복권시장의 규모가 커지는 것들은 어쩌면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또 최근에는 먹방(먹는 방송)이 대세인지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누비며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각종 요리에 관련한 프로그램이 너무 많이 방영되는 것 같다. 한 때는 홀대받던 직업군(職業群)이었던 세프(chef)가 떠오르는 유망한 직업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삶의 질이 윤택해지고 경제적 사정이 좋아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격은 문제 될 것이 없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맛있게 먹느냐? 어디에 가면 좋은 음식을 먹느냐? 가 온통 세간의 관심거리로 부각되는 것 같다. 좋은 음식 먹으며 좋은 생각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멋있는 행동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세계적인 경기 불황의 여파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각종 경제지표는 곤두박질치며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 냉엄한 현실 앞에 이렇게 무분별한 방송 프로그램 편성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인지 의문이 간다. 청년실업자는 넘쳐나고 서민들은 장사나 사업 부진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씀씀이를 줄이는 어려운 실정인데 오히려 이런 현실을 도외시한 채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은 아닌지 저의(底意)가 의심될 정도이다.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는데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방송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방송과 언론은 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조명해야 하며 공명정대하고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분명히 있다. 이렇게 막중한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과 언론이 시청률에만 매달려 이를 외면하고 철저히 상업주의로 빠진다면 과연 누가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인문학 강좌나 각종 교양과 사회 진단 프로그램들은 점점 줄어들어 구색을
갖추기 위해 생색용으로 어쩔 수 없이 끼워 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혹 방송과
언론이 지향해야 할 지표를 망각하거나 등한시 혹은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며 심각히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병이 들기 전 사전 예방하는 것이 최상책이지만 병이 더 깊기 전에 빨리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기에
진단하고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 분명 언론과 방송이 주도적으로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밖에 다른 요인들도 많겠지만 갈수록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사회 구성원 간 화합보다 첨예한 대립 구도로 흐르는 이 시대에 각자 제 위치에서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함이 옳은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볼 시기인 것 같다. 조금만 양보하고 이해하면 교통흐름도 끊기지 않고 물 흐르듯 원활한 것처럼 사회의 소통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다.
윗물이 맑으면 당연히 바람직하고 좋겠지만 언제까지 흐린 윗물을 탓하거나 맑아지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비록 위에서 아래로 혼탁한 물을 흘러 보낼지언정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윗물이 함부로 아래로 흐린 물을 보낼 수 없도록 또 그러한 것을 수치심으로 자성하고 행동할 때까지 아랫물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네 탓이 아닌 내 탓이 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각 분야별로 변화의 속도가 무섭도록 빨라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는 세상이다. 이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긴장의 끈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지만 생존이란 명분 속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없는지 진지하게 돌이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 슬로우 푸드(slow food), 슬로우 로드(slow road)와 같은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빠르게 급변하는 사회에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한 번쯤 가쁜 숨을 달래고 삶을 뒤돌아 보며 주변을 찬찬히 살피고 각자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볼 필요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습관처럼 하고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보고 싶은 책을 운전석 옆에 놓고 신호대기 시마다 짬짬이 읽어 보는데 일 년이면 몇 권의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신호 대기시간이 오히려 짧게 느껴질 때도 많아 조금의 여유를 찾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하여 추천하고 싶다.
‘인간성 회복’이라는 비록 거창한 구호는 아닐지라도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훗날 그때 여유가 되면’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라도 당장 실천에 옮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춰야 할 때 > 돌 위에 앉아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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