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을 멈춰야 할 때/돌 위에 앉아

관점(觀點)의 차이

헤세드다 2014. 6. 30. 14:41

 

--- 관점(觀點)의 차이 ---

인간의 본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 있을까?

본다고 하는 것은 사물로부터 반사된 빛이 망막에 ()으로 맺히는 물리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사물을 인지하거나 느낌을 받아들일 우리는 흔히 본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본다 혹은 보다라는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같다
.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의 감각 기관 육감(六感 / Sixth Sense) 있는데 먼저 눈으로 보는 것을 시각,입으로 느끼는 것을 미각, 손으로 느끼는 것을 촉각,귀로 듣는 것을 청각, 코로 냄새 맡는 것을 후각 여기에다 정신적인 의미의 감각인 육감(肉感)이라 하는데 이를 통틀어 육감(六感)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언어(우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 표현 방식은 실제 눈으로 보는 외의 어떤 감각의 인지 결과에도 끝에는 본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맛보다,만져보다,냄새 맡아보다,들어보다,느껴보다 흔히들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럼 이렇게 뒤에는 보다라는 말을 붙이게 되었을까?

근원은 확실히 수는 없지만 짐작하기에 실제 눈으로 본다는 것이 다른 여타의 어떤 감각 보다 확실하고 감각의 우위에 있기에 이러한 언어의 표현이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것만이 다른 감각기관 보다 객관성이 있기에 이렇게 사용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본다는 것에는 한계와 오류 그리고 개개인의 느낌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있다.

첫째 보는 것의 한계는 인간이기에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서 보는 방향의 것만 밖에는 없다. 사물의 측면이나 뒷면 혹은 내부를 투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건축 도면을 보면 정면도 ,우측면도 배면도로 나누는 것은 인간은 방향에서 전체를 없는 것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번에 여러 방향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번에 수는 없지만 방향에서 혹은 내부에 들어가면 있고 망원경이나 현미경 보조기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는 것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있기에 본다 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한계란 실제 인간이기에 볼래야 도저히 없는 시각의 한계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은 겉만 뿐이지 사물의 (내면의 성질)까지는 없다.

 

둘째 오류라고 하는 것은 빛의 굴절에 의해 혹은 착시에 의한 것으로 신기루 현상이나 투명한 속에 담긴 젓가락이 안에서는 휘어지게 보인다거나 같은 사람이 가로로 무늬 옷을 입으면 뚱뚱해 보이고 세로로 줄무늬 옷을 입으면 크고 날씬해 보이며 동일한 길이의 직선 끝에 화살표 방향을 바꾸면 길이가 달라 보이는 등은 착시로 인한 것으로 이런 오류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셋째 느낌에 의한 차이는 바로 관점의 차이로 가령 잔에 담긴 술을 동시에 보고도 많다고 하는 사람 적다고 하는 사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사물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을 보면서도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것은 똑같이 보고 있지만 보는 개개인의 감정과 느낌이 실려 차이가 발생 됨을 있다. 이렇게 보고 느끼는 것을 관점이라 하며 통상 관점이라 하면 단순히 보는 것만을 일컫는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이렇듯 인간이 본다고 경우 단순히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총체적인 감각 육감(六感)에는 선입견이나 가치관등을 통한 종합적으로 판단한 정보가 함께 보여지는 것이므로 당연히 관점이 서로 다를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관점의 차이는 어떤 과정을 그쳐 발생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눈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보를 동시에 (마음) 인식하는 것으로 우리의 뇌가 갖고 있는 정보는 각자 살아 생활여건과 교육환경 걸어 길이 모두 다르기에 이러한 차이로 인해 각자가 이미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함께 보기에 각기 서로 다른 결과(OUT PUT) 돌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사물을 보면서 정보 입수(IN PUT) 달리 받아들여 지는 것은 각자 속에 이미 저장 되어 있는 정보를 보는 이가 인지하던 하지 않던 보는 찰나에 무의식 속에 함께 보고(입력)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관점이 모두 같지도 않지만 모두 다르지도 않는 것은 인간의 삶에 보편성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라 보는 관점이 유사한 공통점을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욕구가 동일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인간이기에 사물이나 어떤 현상에 대한 관점이 보편적으로 비슷한 공감대를 갖기도

하지만 소수이기는 해도 어느 누구에게는 보편적 공감대 밖의 상당히 이질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점이 개개인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밖으로 표출 되어 다른 관점과 충돌이 생길 때는 이로 인해 갈등과 오해가 발생하며 때로는 관점의 차이로 극한 대립 관계까지 발생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고 판단한 것만이 옳다고 확신을 하는 것이다.

관점은 개개인의 고유한 관점뿐만 아니라 가족 나아가 지역이나 민족 등이 함께 공유하는 동일 관점이 있을 있으며 구조적으로는 수직적과 수평적 관점의 차이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수직적 관점의 차이는 세대간의 차이이며 수평적 관점의 차이는 보수와 진보라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기에 보는 것에 대한 한계와 오류가 그리고 관점의 차이가 분명이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 한다면 대립과 갈등은커녕 어쩌면 지구상에 분쟁이나 전쟁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자성어(四字成語) 중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은 관점의 입장을 바꿔 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옹고집 고집이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며 이해력이 많다고 하는 사람은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남을 배려한답시고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지 않으면 우유부단하거나 주관이 없는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무조건 자신의 관점만이 옳다고 우격다짐 식으로 하면 분명 여러모로 무리가 따를 것이다.

 

보통 토론을 찬반 격론이 벌어질 때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들의 주장(관점) 내세우며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깊이 들을 생각도 않고 아예 무시하거나 즉시 반론을 펼치는 것을 많이 접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자기가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만 남이 판단하는 것은 그르다는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그렇게 강하게 주장할 것이다.

 

물론 옳다고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장을 굽히지 말아야 것이며 자신이 틀렸을 때는 빨리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렇게 관점의 주장과 배려가 상황에 따라 수학공식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 쉽고도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한다. 통상 가정에서 부부싸움이나 부모와 자식간의 불화나 가족간 불화의 시작점도 따지고 보면 이런 사소한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것이니 어쩌면 완전무결하게 일치된 관점을 찾기란 불가능하여 영원히 없는 미제(未題) 남을 밖에 없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하게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보편적인 사상의 울타리에 갇힌 우리는 때로는 불완전하게 바라 봄을 같이 공유함으로써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생각의 저변에 깔려있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보는데 자기만 유독 달리 생각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장 빗발치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거나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조금은 피곤한 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동일 관점으로 형성되는 것이 공감대라고 말할 있는데 아무래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보니 공감대안에 있을 안주(安住)감을 느낄 밖에 없으며 공감대 밖에 있을 때에는 다른 이들이 따가운 시선과 기피 혹은 심할 때는 적대시(敵對視)까지 하는 눈길로 인해 다소 불안감이나 고독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본인 스스로 특별한 우월감(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판단했을 ) 빠져 상대방의 생각(관점) 비하하거나 얕잡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보편적인 바라봄의 세계 속에서 지탱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보편의 사상의 관점에서만 점철(點綴)되어 것만은 분명히 아니다
인류의 진보는 보편적 사상 위에 특별한 관점을 갖는 몇몇 소수의 위대한 인간의 사고와 행위로 인해 인류역사가 바뀌고 진보되어 것도 부인할 없는 사실이다.

원론으로 되돌아가 사람이 본다는 것은 육감(六感) 동원한 입체적인 바라 봄이지만 어쩌면 불완전하기 이를 없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인정해야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 본다는 것은 불완전함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옳은 만은 아닌 편견(偏見)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보고 조금이라도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상대방의 관점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갖고 접근을 한다면 분명 관점의 변화가 생길 것이며 아마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워 것이다.

 

복잡하고 뒤돌아 없는 바쁜 현대사회에 살고 있지만 가끔 한번쯤은 편견의 두꺼운 껍질을 과감히 깨고 속에 갇혀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혜안(慧眼) 갖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면 분명 평소의 관점과는 다른 무엇을 있고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자주는 아닐지라도 망중한(忙中閑) 속에 자신을 타자(他者)라고 대상을 설정하여 냉철하게 여러 관점에서 바라 본다면 여태 마음 속에 잡다하게 갖고 있던 군더더기를 있을 것이며 직관(直觀) 깊이는 한층 깊어지리라고 생각을 본다.

물론 여건이 허락되어 동안거(冬安居) 하안거(夏安居) 혹은 피정(避靜) 있다면 좋겠지만 굳이 이런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관점을 달리 보면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 바로 시간 24시간이 안거(安居) 피정의 장소요 시간이 아닐까 한다.  

 

이렇듯 자신의 관점에 대한 현주소를 깊이 생각해 보고 울타리를 과감히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쩌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의 모든 것은 허상(虛像) 수도 있으며 자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상이 () 본다(?)

우리 인생사 짧고도 짧은 세상살이에 지금 앞에 당장 보이는 모든 것이 보고 있는 같으면서도 것이 없는 허상 속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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