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장을 하면서~~~~
올해는 집 사람 건강 문제로 웬만하면 김장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10월경에 김장을 할 요량으로 미리 구입해 놓은 고춧가루와 마늘 양이 많아 이 때문에 김장을 할까 말까 이리저리 재다가 결국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퇴근을 하니 욕실에는 많은 양의 배추가 여름내 햇볕을 피해 숨어 다니다 하얀 속살과 살갗이 보일 듯 말듯한 노르스름한 얇은 속치마를 배시시 드러낸 채 누워있었다. 하지만 원치 않았는데 세상 밖으로 오랜만에 잠시 구경시켜 놓고는 답답한 비닐 속에 감금해서 소금 물에 잠가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갖은 고문은 왜 하냐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죽네 사네 하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김장을 하지 않고 사서 먹는 방향으로 마음이 굳혀져 가는 분위기였었는데 절여져 있는 배추를 보는 순간 올해는 김장을 안하고 편하게 넘어가리란 얄팍한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공기 방울이 하나 둘 터져버리듯 허공에 사라져버렸다.
할 계획이 없었기에 주 재료인 배추 외에는 미리 다듬어 준비 해 놓은 것이 없었으며 일요일 하루 만에 끝내려면 아무래도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고서는 오후 늦게나마 단 몇 시간이라도 잠시 편히 쉴 수 있는 일요일을 보장받기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최근 몇 주 동안 일요일 마다 등산이다 여행이다 하여 집에서 편히 쉰 적이 없어 이번 주 일요일만큼은 오랜만에 늦잠도 자고 게으름을 피며 편하게 휴일을 보내고 싶었는데 절여져 있는 배추 속에 이런 생각들도 함께 푹 절여져야만 했다.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른 생
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마늘 쪽을 쪼개어 내일 새벽에 까기 쉽게 물에
불려 놓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내일 해야 될 예상되는 일들이 머리 위를 필름 돌
듯이 지나 가며 점점 걱정거리로 다가와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
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늘을 까놓고 아침 일찍 번개 시장에 가서 젓갈도 사야
하고 절여 놓은 배추도 씻고 속에 넣을 무채를 썰고 버무릴 때 보조를 해며 또
김장이 끝나고 나면 마무리 집안 대 청소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시작도 하기 전
에 피곤함이 밀려왔다.
흔히들 ‘남자가 김장하는데 뭘 걱정하느냐 다 해 놓으면 삶은 돼지 수육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이면 될 것을....’라고 말하지만 남들이야 돕든 말든 또 어떻게 말을 하든 간에 이렇게 김장을 할 때면 꼭 도와서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 의무감처럼 머리 속에 각인 되어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며 또 하나는 남자 즉 생물학적 분류인 남성이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가족의 생계 특히나 식량 부분에 대한 것들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의 대한 기억 중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손도 까닥하시지 않던 분이었다. 부엌일 같은 경우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그시기가 떨어진다’ 하시며 부엌 일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고 우리들도 가급적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집안 일중 특히나 부엌일 만큼은 오로지 여자가 해야 되는 일임을 누누이 강조하셨던 분이었다.
찬 바람이 살금살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는 김장철이 되면 김장 독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볏짚으로 보온 움집을 만드시는 것이라든가 무,배추 저장용 구덩이를 파는 것 등은 아버지가 해야 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가 되며 그 정도 힘든 일은 당연히 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김장철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배추를 씻고 말랭이를 하시려고 무나 호박,가지를 직접 써시고 잘 말리기 위해 바느질 하듯 바늘에 실을 꿰서는 일일이 엮는 것을 보고는 참 신기하게 생각하였고 이런 모습은 낯선 풍경으로 다가 올 수 밖에 없었다.
칼,도마.바늘,실 등은 평소에 아버지의 모습과는 도저히 조합이 되지도 않으며 어울릴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김장철만 되면 이런 도구들을 스스럼 없이 잡고 집안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평소 양반임을 또 근엄한 남자임을 강조하며 말씀하신 분이 맞는가 할 정도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하였다.
그런데 성인 아니 남자임을 인식할 나이가 되면서 점점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조금씩 이해되었다.
지금이야 꼭 김장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 해 놓은 것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도 있고 그때그때 싱싱한 것을 사먹을 수가 있으니 꼭 김장을 해야만 하는 강박관념 같은 것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치러야 할 중요한 연중행사 중의 하나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특히 혹독한 겨울 한파가 밀려 오기 전에 긴 추위를 보내기 위해서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듯이 미리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예상될지는 뻔히 알기에 겨울로 들어 서는 길목에는 주 식량인 쌀,보리 다음으로 보조 식량인 김장이라든가 말랭이 등을 마련하는 일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먹거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김장 김치 가운데 배추 김치는 반찬이기도 하지만 배가 고플 때는 몇 조각씩 먹어 허기를 면할 수도 있고 밥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만큼 여러 가지 반찬으로 무한히 변신 가능한 것으로, 많은 김치 종류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필수적으로 담아야 할 모든 김치의 맏형 격이었다.
평소 아버지께서는 양반 가(家)의 자손인 안동 김씨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누누이 이를 강조하시던 분으로 술을 한잔 드시고 오는 날이면 어
김 없이 무릎을 꿇어 앉히고는 족보에 대한 교육을 하시고 또 가끔은 인지하고
있는지 질문을 하시며 이를 외우게 하셨다.
하지만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가문,족보, 양반이란 아무 의미도
쓸모 짝에 없는 것으로 오히려 이런 배고픔의 현실 앞에 오히려 조상이란 분들이
밉게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는 속담처럼’ 배고픔 앞에서는 양반의 후손
임을, 남자임을 자처하시던 아버지께서도 김장 앞에서는 체면도 허울도 과감히
던져 버리셨던 것이다.
농사지을 땅 한 평 없으니 곡식 창고가 따로 있을 리 없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하는 가장으로서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김장 담그는 것과 겨울 양식 준비는 만큼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매년 김장철이면 밤 늦게까지 호롱불 밑에서 도마 위에 칼질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특히나 올해는 봄에 세상을 달리하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김장을 담게 되는 터라 지난날을 회상하니 가슴이 저미어 온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이기는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그냥 동물로서의 수컷 즉 남성으로서의 의미이다.
과연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알 수는 없지만 여자도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야만 하는 숙명의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남녀평등 아니 여성 상위시대라 할 만큼 성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그런 성적(性的)으로 해야 되고 말아야 하는 일에 대한 차별적 분담의 측면을 말하고 자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수컷 즉 남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갖게 되는 무의식 중의 사고 방식에 대한 것이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명을 연명해야 하는 원시시대에는 주로 남자가 사냥을 하였을 것이다. 상상하건대 사냥이란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때로는 목숨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게을리 하거나 회피했다가는 가족이 굶주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남자라는 동물은 존재하는 한 이러한 본능이 피 속에 흐르기에 수 많은 세월이 흘러 문명이 진화되어 방식과 형태는 달라졌지만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남자로서의 운명의 길일 것이다.
아버지도 나도 부자 관계와 세대를 떠나 한 남자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같은 운명의 길을 걷기에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이지만 김장철이면 생물학적으로 수컷 인 한 남성으로 매년 조우를 한다.
김장을 담는데 괜히 사족(蛇足)같이 확대해석을 할 필요가 있느냐 만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매년 김장철이면 새삼 남자임을 깨닫게 하고 그러므로 해야 될 일이 무엇이며 남자이기에 걸어 갈 수 밖에 없는 숙명의 길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만일 그 어느 때인가 태어났다면 돌 칼과 돌 도끼를 들고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날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수컷이라는 동물적 본능으로 사나운 짐승에게도 물불 가리지 않고 과감히 덤벼들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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