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을 멈춰야 할 때/돌 위에 앉아 ...2

갑(甲)의 횡포

헤세드다 2015. 3. 17. 10:16

 

 

 

                    --()의 횡포--

 

요즘 갑질 논란으로 신문, 방송이나 인터넷 등 여러 매체를 뜨겁게 달군다. 갑질이라고 검색하면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하고 있다. 갑을 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갑질의 주체가 꼭 정치인,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부자 등 권력이나 돈 지위 등이 높고 많이 가진 자만의 전유물은 분명 아닐 것이며 최근에야 발생된 사회적 문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인간이 지구 상에 생존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끊임없이 발생되어 왔지만 최근에 이렇게 불거진 것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통신분야의 눈부신 발전으로 소통의 수단이 세계화,대중화의 속도가 빨라짐으로써 수면 위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갑에 대해 상대적인 을이 언제나 을이란 꼬리표를 다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 또한 영구불변이 아닌 얼마든지 뒤바뀔 수도 있으니 어쩌면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할 것이다. 가정, 학교, 회사, 사회 등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은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잠재적 욕망이 마음속에 늘 도사려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미생이란 드라마를 인기리에 방영하였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지만 원작인 만화를 미리 보았기에 빨려들 듯 전편(全篇)을 재방송까지 보았다. 상당 부분 지난날 겪은 나의 이야기 같아 보는 내내 눈물을 많이도 적셨다.

요즈음 심각한 실업대란으로 구직자들이 넘쳐 취업하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이란 것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만 열심히 다 한다 해서 오래도록 그리고 마음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실감했던 적이 있었다.

 

오래 지난 일로 아마 25여 년 전쯤의 일이었다. 직장 내의 상사(上司)들로부터 조직적으로 갑질을 당해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 쓰라렸던 그때의 일을 적고자 한다. 딱히 이 상황을 갑질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돈이나 권력 등 뭐가 되었던 가진 자의 횡포로 인해 어찌할 도리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다.

 

당시 회사는 임직원을 합해 200여 명 정도의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지금도 페인트 업계의 1,2를 다투는 인지도가 꽤나 높은 M 페인트의 자회사였다.

퇴사하기 몇 년 전 영업관리에 근무하며 과장으로 진급되어 처음으로 간부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간부회의라는 것이 과장급 이상이라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참석자 중 서열이 제일 낮으니 회의실의 제일 구석진 자리로 게다가 뒷줄에 배치를 받았다.

 

임시 회의였는데 주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고 몇 달 동안 매출이 많이 떨어지니 예고 없이 회장님이 갑자기 회사 간부들을 소집한 회의였기에 분위기는 당연히 초상집 같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말이 회의지 실상은 회장님이 한 시간 넘게 일방적으로 전 간부를 대상으로 질타를 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모두가 입에 바위를 매단 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고 자연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 탁자만 응시한 채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긴 시간이 지나고 회장님은 노여움을 다 푸셨는지 아니면 지시할 말씀을 다하셨는지 헛기침을 몇 번하시더니 박전무부터 차례대로 앞으로 어떤 각오로 업무에 임할 것인지에 대해 각자 소견을 말해봐라고 하셨다.

 

박전무는 의자에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감히 회장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지도 못하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며 앞으로 심기 일전해서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짧게 소견을 피력했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그럼 여태까지 놀면서 일했냐?”는 식이었으니 어차피 각오라는 개인적인 소견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전 간부는 짧게 소견을 말하고 일일이 회장님으로부터 크고 작은 질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시선을 피해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내 차례가 되어 일어섰다. 앞에 다른 간부가 방패막이되어 뒤에 숨은 듯 앉아 있었지만 위치가 정면에 가까우니 자연 회장님과 눈빛이 스치듯 잠깐 마주쳤다.

 

앞서 간부들이 모두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냥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던 모든 간부의 눈이 일제히 내게 쏠리며 김과장 너만 최선을 다했냐? 이제 회의가 마무리되어 가는 마당에 쓸데없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생뚱맞게 그게 할 말이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험한 눈빛만 무겁게 오갈 뿐 숨소리마저 멈춰버릴 정도였고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랭한 채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전무님부터 모든 간부들은 일제히 날 선 도끼 눈빛으로 그냥 한 마디 꾸중 듣고 말지 괜히 회장님 심기를 건드려서 도대체 이제 이 분위기를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라는 언짢은 말들이 귀 속을 따갑게 울리는 듯했으니 마치 태풍 전야 같은 분위기였다.

 

나도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회장님 면전이지만 누구도 소신껏 말 한마디 못하고 무조건 읍소하는 간부들의 태도에 대해 나름대로의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의 매출 부진은 비수기인 데다 국내외 경기가 악화된 탓이기는 하지만 전 직원은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다음 분기에는 분명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사실대로 보고 드리지 못할까? 분명 회장님도 이 사실을 모르시는 것이 아닐 것이며 설령 통례적으로 하는 잔소리라 해도 회장님 심기가 불편하다 싶으면 무조건 회장님 앞에서는 절절매며 비위를 맞추려는 몇몇 고위 간부들에 대한 강한 반기(半旗)였다.     

 

어찌 되었건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잠시 무거운 정적 속에 회장님은 한참 나를 향해 무섭게 노려보시더니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않고회의 끝하며 책상을 두 손으로 한번 내리 치시더니 그냥 나가시는 것이었다.

 

회장님이 나가시고 간부들이 회의실을 막 나서는데 전무님이 김과장 참 잘났어하며 뼈 있는 한 마디를 비아냥거리듯 툭 던지며 휑하니 앞서 가시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간부들도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수군거렸고 그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사무실로 오려니 평소 친하게 지낸 기술부 유차장이 옆구리를 푹 찌르며

나지막이  김과장 그냥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고 회장님께 한 마디 듣고 말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여태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게 말한 것이 뭐 잘못되었습니까? 물론 제가 한 말이 회의 분위기상 맞지는 않지만 솔직히 지금 보다 더 열심히 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거짓말 아닌가요? 뭘 더 어떻게 열심히 한단 말입니까? 아침 출근 시간보다 한두 시간 일찍 와서 죽자고 회사에서 일해온 것 아닙니까? 사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으며 애들 얼굴 볼 시간 없으니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또 일요일에도 수시로 나와야 하며 쉬는 날이 있어도 맘 편히 제대로 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에게는 잔업이나 특근 수당도 없지 않습니까?” “시쳇말로 샛별 보기 운동 아닙니까? 날마다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하는 날들인데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된 것 아닙니까?”

물론 김과장 열심히 하는 것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위에 간부들이 좋아하겠어 분명 회장님께 잘 보이려고 했다며 수군댈 거야 다들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그런 것 잘 알면서…”  예 잘 압니다.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회장님께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과감히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간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무님이나 이사급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옹호하고 대변해 주는 것이 맞지 않나요? 특히 생산직원이나 간부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회장님이 앞에서는 손바닥이 닳도록 무조건 예 예하며 비위나 맞추려 하니 일부러 들어라 한 말입니다. 소신 있는 말 한마디 못하니 오히려 그것이 회장님께 아부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혹 김과장이 미운털이 박혀 불이익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렇지 어쨌든 됐고 이따 퇴근할 때 쐬주 한잔 혀

 

그렇게 그 일이 잊혀지고 덮이는 듯 흐른 며칠 지나서였다.

현장에 제품 재고를 확인할 것이 있어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는데 회장님 여비서가 숨을 헐떡거리며 다가와서는 어휴 김과장님 여기 계셨네 한참을 찾았어요 회장님이 찾으시니 지금 빨리 회장실로 가보세요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나를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빨리 가보세요하고는 달음박질하듯 뒤돌아 가는 것이다.

 

회장실이 어디에 있다는 것이야 알지만 단 한 번도 가본 일도 아니 갈 일도 없었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문득 며칠 전 회의 때 내가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혹 회장님이 말단 과장 주제에 아주 건방진 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에 감봉이나 정직 등 징계 차원의 조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서둘러 회장실로 향해 3층에 있는 회장실 전용 계단을 막 올라가려는데 몇 걸음 앞서 가시던 전무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니 김과장이 여기 무슨 일로…?” 하며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시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께서 급히 찾는다기에 지금 가는 중입니다.” 하니 아니 어디 건방지게 신참 과장 주제에 회장실에 드나드는 거야하는 상당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색함을 뒤로하고 전무님을 뒤따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회장실에 들어섰다. 들어온 것을 분명 알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뒷짐을 지고 등을 돌린 채 창 밖만 응시하셨다. 그냥 선 채로 우두커니 있으니 한참 후 돌아서서 소파에 앉으라고 하시고는 잠깐 동안 말없이 몇 번이고 나와 전무님을 번갈아 보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시는 듯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이쯤 되니 깊은 수중에 갇힌 듯 짓눌려 오는 무게감에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숨쉬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고 힐끗 곁눈질을 하니 전무님도 상당히 긴장해 있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나를 한번 더 쳐다보시더니 전무님을 향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입을 떼시며 낮고 묵직한 소리로 이 친구 말이야 총무과에 지시해서 내일부터 자재부에 근무하도록 인사발령 내게이 한마디에 영문을 몰라 전무님과 나는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지만 감히 이유를 여쭐 분위기도 아니어서 그저 석고상이 된 듯 몸도 마음도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는 ! 결국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모든 것을 체념할 수 밖에는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회장님을 잠깐 올려보니 자네는 그리 알고 내일부터 자재부로 자리를 옮기게 그리고 잘하고 그럼 됐으니 먼저 내려가 보게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섰지만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온 몸이 굳어 발걸음 조차 제대로 옮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들어서면서부터 나갈 때까지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도대체 어떻게 올라갔고 어떻게 아래층까지 내려왔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주 좋을 수도 아주 나쁠 수도 있는 극단적인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긍정적인 측면은 자재과라는 것이 어느 회사인들 다 그렇겠지만 나름대로 노른자위 같은 부서이니 경질하는 의미에서 자리 이동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부정적인 측면은 현재 자재부에는 자재이사와 대리 계장 등 부서원의 자리가 다 채워져 있었기에 따로 내가 근무할 자리가 없으니 경질하는 차원에서 인사이동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 업무도 없이 대기 발령 상태로 있다가 자진해서 사직서를 내도록 유도하는 이 두 가지 외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하여 퇴근 후 기술부 유차장과 술 한잔을 하며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해 보았지만 대답은 내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모든 궁금증은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해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직감한 것은 먼저 출근한 직원들이 인사를 하며 마주친 뒤 힐끔거리며 지나가는데 평소에 인사하던 것과는 다른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니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무실로 가기 전 휴게실에 가서 자판기에 커피 한잔 뽑아 들고 가야겠다며 아무 생각 없이 휴게실에 들렀다.

 

그런데 휴게실 옆 회사 알림판에 몇몇의 직원들이 모여 게시판의 공지사항을 보고 뭔가 수군수군 대고 있기에 무슨 내용 때문에 그럴까 하고 다가서니 나를 보고는 다들 한 걸음씩 물러서며 김과장님 좋겠습니다. 축하합니다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몰랐지만 게시판 내용을 보는 순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발령  ‘00일부로 자재이사 000 파면 영업관리부 김00과장 자재이사 대행으로 임명함이라는 큼직한 글자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 또 봐도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 회장님으로부터 자재부에 근무하라는 지시는 받았지만 긍정과 부정적 측면이 반반이었기 때문 걱정을 많이 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회사에서 회장님 측근 중의 측근으로 모두 잘 알고 있는 자재이사가 왜 갑자기 파면이 되었을까? 직책은 이사이지만 전무보다 파워(POEWER)가 세고 회장의 먼 친척이라는 소문도 있어 이 회사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일과 후 휴게실에서 회장님과 거의 매일 바둑을 두며 신뢰와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자재이사가 왜 하루아침에 두부 잘리 듯 그렇게 되었을까? 모두가 다 잘려도 자재이사만큼은 살아남을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장이란 직책으로 이사대행이라는 인사발령은 창사이래 유래가 없는 파격적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사조치였기에 도대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벙벙하기만 하였다.

 

모든 궁금증을 뒤로한 채 짐을 챙겨 자재부로 왔지만 따갑게 바라보는 둥 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진급한 것도 아니지만 누가 생각해도 이 상황은 진급 이상의 파격적인 인사조치였기에 모든 직원의 눈초리는 부러움과 질시가 섞인 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경로를 통해 왜 이런 인사조치가 이뤄졌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파면당한 자재이사가 자재 매입 과정에서 상당한 금액을 횡령하였으며 그것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했었다는 제보를 입수하고 내사해 왔었다는 것이다. 회장님 지시로 기획실에서 진작부터 결정적 증거를 잡기 위해 비밀리에 그리고 광범위하게 감사를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자재이사가 월 결재하는 금액이 원자재인 철판만 하더라도 월 10억 가까이되는 큰 금액이었다. 그러니 자연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는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매입처로부터 접대나 향응은 물론이오 어느 정도 뒷돈을 챙겼을 것이며 그 돈으로 집을 샀니 차를 샀니 하는 말들이 가끔 살짝살짝 돌기는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막연한 소문으로만 떠돌았을 뿐 누구도 대 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큰 금액을 결재하는 노른자 같은 자리이니 다분히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뜬소문만 무성했지만 어떤 근거도 없었고 한마디로 그렇다 카더라라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도대체 무얼 믿고 그 자리에 나를 앉혔을까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여태껏 회장님과 단 한마디의 사적인 대화는 고사하고 지나치며 얼굴 대면한 것도 손꼽을 정도였으니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 말고도 유능한 간부들이 있었으니 스스로도 그 자리가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거북하게 느껴질 수 밖에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이번 인사이동에 있어서 나에게 주는 무언의 메시지는 확실한 것이었다. 투명한 자재 매입 그것이 회장님의 분명한 지시라는 것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재부에는 부자재외 기타 물품을 담당하는 이대리와 원자재를 파트를 담당 보조하는 최계장 전체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여직원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날부터 회사 전체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태에서 자재이사 대행이란 꼬리표를 달고 근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전무님은 물론이오 우선 몇 명의 이사로부터 강한 견제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업무적인 무시를 당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업무 외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선 남아 있는 현 자재부의 팀원들이 여러 구설수로부터 가장 피해자 일 수밖에 없으니 다독거리고 심기 일전해 나갈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업무 방향에 대해 며칠 동안 구상을 한 끝에 회의실에 모여 처음으로 확실하고 단호하게 업무 지침을 내렸다.

먼저 이번 일로 모든 직원들이 색안경을 끼고 우리를 바라보니 무엇보다도 모든 자재구매에 있어서 공정하고 투명한 업무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야. 아직 업무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우선 원자재는 내가 책임지고 할 것이며 부자재 및 기타 구매는 이대리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하도록 해” “원자재는 금액단위도 크지만 원활한 수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최계장은 나를 최대한 도와주고 부자재 관련된 것은 일체 관여를 않을 것이며 모든 권한을 위임할 테니 이대리가 전결자라는 마음으로 책임지고 업무를 하도록 해 그리고 분명히 밝히는 것은 나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 팀원을 믿으니 지난 일은 빨리 잊고 더욱 분발하도록 하자”.”

 

이렇게 시작된 자재부 근무는 아픈 상처를 뒤로 하고 전무나 이사들의 크고 작은 견제의 파도가 수시로 덮치기는 했지만 보란 듯이 더 꿋꿋하게 항해를 해 나갔다.

 

자재 업무를 하면서 지금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라 해야 할까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부자재 담당인 이대리와 관련된 일이었다.

 

자재 업무를 맡은 지 7-8개월 지났을 무렵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이대리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김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오늘 저녁 퇴근 후에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다. “그래 이대리가 할 말이 있다는데 없는 시간도 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표정을 보니 뭔가 심각한 일 같은데?” 미리 소스(source)를 주면 안 될까?”라고 얼굴을 바라보니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과장님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 저녁에 모 업체 사장님이 과장님을 꼭 뵙고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합니다.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거절도 했고 과장님이 업무와 관련하여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은 절대 안 한다고 수 없이 말을 했지만 죽기 살기로 부탁을 하니 저도 참 난감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저히 고민하다 이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상황을 이해하기보단 화부터 먼저 났다.”아니 이대리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업체 사장뿐만 아니라 자재매입과 관련된 누구도 회사 밖에서는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러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예 물론 저도 너무 잘 압니다. 근데 정말 막무가내로 저러니 죄송합니다만 이번 한 번만 같이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피하고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정말 찰거머리 같이 들러 붙어 저러니 정말 미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제발 만나주십시오하며 오히려 이대리가 사정사정하는 것이었다. 업체 사장이 자재부 직원과 저녁 먹자라고 하면 용건이 무엇인지 삼척동자도 알기에 절대 하지 말도록 지시했었는데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이대리가 이렇게 부탁을 하니 무턱대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퇴근을 하여 시내 음식점에 이대리가 동석한 상태에서 업체 사장과 어색하게 인사를 한 뒤 가볍게 술 한잔을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만나자고 했냐고 용건을 물었으나 교묘하게 대답을 슬쩍슬쩍 피해 가는 것이었다. 계속 자리를 같이하기에는 속내가 뻔히 보이는 자리였기에 업체 사장에게 저를 극구 만나자고 하는 것에 대해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제품에 관한 것이나 납품에 관련된 것은 제 소관이 아니니 이대리와 상의를 하십시오. 제가 관여할 부분도 아니거니와 모든 것은 이대리가 결정하면 아주 특별한 사항이 없다면 바로 결재해줄 뿐입니다.”라고 하니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아 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오늘 어렵게 시간을 내어 주셨는데 그냥 가볍게 살아가는 이야기나 하지요하니 금방 일어설 수도 없고 몇 잔의 술이 오가며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얼마 후 이대리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대리가 자리를 비우자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며김과장님 이대리가 혹시 회장님의 자제나 친척입니까?”하며 정색을 하며 묻는 것이었다. 참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묻습니까?” 그러니 재차 정말 이대리가 회장님이나 사장님의 친척이 아니지요?” “아니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물어봅니까?” 하며 의아해하니 손을 꼭 잡은 채 내 쪽으로 바싹 몸을 기울이고는 에이 과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자꾸만 이대리에게 결재권이 있다 하니 이대리가 회장님 친인척인 줄 알았지요 그럼 모든 것은 과장님만 OK 하면 결정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잘 해드릴 테니 저희 제품 꼭 납품할 수 있도록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모든 답은 나온 것 같았다. 업체 사장은 이대리와 잘 안되니까 어떻게든 납품을 하려고 전결권자로 판단한 나를 찾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상당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얼마 후 업체 사장이 화장실에 가고 자리를 비웠을 때 이대리에게 이대리 일단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빨리 가서 여기 음식비부터 어서 계산 해 그리고 업체 사장이 돌아오면 바로 일어서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회사에서 따로 지시할 테니 그리 알고눈치 빠른 이대리가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고 업체 사장이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것은 빠르게 이뤄졌다.

 

자리를 파하면서 우리가 계산을 미리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업체 사장이 몸을 이리저리 꼬며 아니 김과장님! 당연히 제가 내야 하는데 왜 계산을 하셨습니까 이런 경우는 없지요 그럼 2차로 다른 곳에 제가 모실 테니 가시지요하며 팔을 잡고 이끌었지만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다른 핑계를 대고 헤어졌다. 물론 혹 마음 약한 이대리에게 손을 내밀까 염려스러워 곧장 집으로 들어가라고 눈짓으로 말했다.

 

다음 날 자재부 아침 미팅을 하고는 이대리를 따로 불러 지시를 하였다. “이대리 난 이대리를 믿고 지금까지 업무를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다른 것은 모르겠다만 만약 앞으로 어제 그 업체 사장의 제품이 단 한 개라도 우리 회사에 납품이 된다면 이대리를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대리도 그 회사 제품이 가격이나 품질 등 무슨 문제가 있기에 승인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해 아니 그리고 말이야 오너가 자기 회사의 제품에 대해 품질과 가격으로 승부를 걸어야지 뒤로 리베이트를 주며 납품하려는 그 업체 사장의 마인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 내 말이 맞지 않나?” “그리고 앞으로 어떤 경우라도 절대 그런 자리를 만들어서도 안되고 이대리도 퇴근 후에 업체 사장을 만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어하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과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못했습니다.” 하며 잔뜩 움츠려있기에 이대리가 마음이 약하고 정이 많은 것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업무는 업무 아닌가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지 나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무조건 이대리를 믿어 자! 우리 열심히 하자고하며 어깨를 가볍게 툭 쳐주었고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또 한 가지는 그로부터 2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원자재 쪽에는 월 구매 금액도 크지만 매입처는 지금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우리나라 굴지의 철강업체들로 영업활동이 치열하였다. 하지만 3-4군데 회사의 제품을 복수 거래하면서 매입 금액을 적절히 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끔 원자재 품귀현상으로 철강파동이 날 때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는 동종 업종에서 원자재 확보에 비상이 걸려 오히려 역으로 매입처에 사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직 한번도 그런 상황을 겪지는 않았지만 최계장의 조언에 따라 매입처와 적절히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어찌 되었던 철강회사 영업 담당자들은 나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무척이나 애를 썼다. 퇴근 후 식사나 술자리를 마련할 테니 시간을 비워달라며 전화 올 때도 많았고 회사에 찾아와 직접 이야기를 하거나 최계장을 통해 수 없이 입질을 하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절할 수 없는 것은 원자재 파동을 대비해 적절히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고민 끝에 방법을 생각해냈다. 퇴근 후 원자재 업체 영업팀과 식사나 술자리를 가질 때는 두 가지 원칙을 먼저 말했고 이것을 지켜나갔다. 첫째는 무조건 자재부 팀원 전원이 자리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더치페이(Dutch pay)는 딱히 아니지만 비슷한 금액으로 번갈아 음식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한 거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고심 끝에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식사나 술자리가 몇 달에 한 번 꼴로 있었지만 처음에는 영업 담당자들이 이 방식

에 대해 다소 어색하고 불편해하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부담도 없고 그렇게 자리

만드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하였다. 자리를 몇 번 같이 하면서 차츰 내 진의를

확실히 알고는 거래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더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서 음식비를 내가 지불했고 2차로 생맥주 집에 가자 하여 끝나고 나오려는데 S철강업체 영업 차장이 김과장님 오늘 깜박하고 지갑을 놓고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돈이 있으면 10만 원만 빌려 주십시오하며 계산대 앞에서 난처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그럼 여기 계산도 내가 할 테니 제게 빚을 한 번 진 겁니다하고 계산을 하려니까 그러면 규칙이 깨지니 안 된다며 극구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술 값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하고 내려서 혼자 한 잔 더하고 가야겠다며 막무가내로 우기며 10만원을 빌려갔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게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며칠 후 회사를 방문한 그 영업차장이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사무실 계단에서 빌린 돈이라며 건네주었다. 별생각 없이 돈을 받아 봉투를 넣으려는데 때마침 사무실로 올라오던 관리이사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빌려준 돈을 되받는 것이라 떳떳하니 뭐라고 변명을 할 것도 아니기에 그냥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관리이사님의 눈초리는 뭔가 부정한 장면을 봤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아무 말 없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시더니 사무실로 들어가시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영업 차장도 아이참 혹시 이 때문에 김과장님이 곤란해지시는 것 아닌지요 차라리 아까 모두 있는 사무실에서 그냥 드릴 것 잘못했네 그렇다고 빌린 돈을 갚는 것이라 말씀드리는 것도 그렇고 어떡하면 좋겠습니까?”하며 난감해하였다. 빌린 돈을 받은 것이니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한편으로 마음 한켠은 찝찝하였다. 그렇지만 이사님을 찾아뵙고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은 오히려 모양새가 우스울 뿐이었다. 또 그렇게 설명한다 해서 누가 아 그래 그랬구나하며 쉽게 믿겠는가 특히 관리 이사님은 회장님의 사위로 특별히 하는 업무는 없지만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 자재이사가 자금 횡령으로 파면된 마당이라 아무리 투명하게 업무를 해 왔다지만 다른 직원들이 내게 쏟는 의혹의 눈길마저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명절 선물로 들어온 것조차 리스트를 만들어 모두 보고하며 업체로부터 청탁이나 리베이트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리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할까 이미 횡령이란 전력(前歷)도 있고 자재 부서라는 자체가 다들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 부서인 것이다. 그런데 봉투를 건네는 장면을 다른 직원도 아니고 관리이사가 정면으로 목격하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달리 해명할 방법도 마땅히 않았지만 뒷조사를 한다 해도 꿀릴 것이 없으니 개의치 않고 근무를 하긴 해도 찝찝함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계장이 할 말이 있다고 하여 회의실로 들어가니 과장님 어제 관리이사님이 호출해서 갔더니 며칠 전 과장님이 S철강업체로부터 봉투를 받는 것을 보았다며 이것저것 묻더군요 그리고 최근 원자재 쪽 영업 팀들과 밖에서 언제 만났으며 주로 누구와 만나는지 등등 꼬치꼬치 캐 물었고 또 과장님의 업무에 관련한 여러 가지를 자세히 물어보셨습니다.

근데 과장님! 말씀 안 드렸지만 얼마 전 돈 봉투 건은 사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S철강업체 차장이 전화가 왔었는데  아마 김과장이 곤경에 처할 수도 있을 텐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해서 저도 해명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사님께서 그걸 물으시기에 얼마 전 과장님이 10만 원을 빌려주는 것을 우리 부서원이 다 보았고 봉투는 그 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빌려주게 된 그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잘 못 믿겠다는 듯 몇 번이나 재차 다그치시듯 확인하시기에 정 못 믿으시겠다면 이대리나 여직원에게 지금 바로 전화로 확인해 보십시오 했더니 그제야 알았다 하시며 나가라고 하시더군요” “과장님 괜히 그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요 이제 괜찮을 겁니다.”하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OK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두 사건을 겪으며 투명한 자재 매입에 최선을 다했지만 정말 힘들고 괴로웠던 것은 전무를 비롯하여 이사진들의 조직적인 업무 방해였다.

물론 회장님의 신임을 받고 파격적인 인사가 이뤄졌으니 고위 간부들이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각오했지만 견제 아닌 견제 방법들이 너무 심하고 치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여기저기 다른 부서에 가서 험담을 하는 것은 기본이며 직책이 낮다는 이유로 업무적으로 무시를 많이 당했다. 특히나 결제자금이 있음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매입처의 결재를 일부러 미뤄는 일은 다반사였다. 또 여직원이 업무에 적응한다 싶으면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다른 부서로 보내거나 특성상 전수검사를 할 수 없는 부자재에 대해 불량이 한두 개라도 섞여 있기라도 하면 침소봉대하여 떠벌리고 다니는 등 방법도 다양하였다. 정말이지 비록 직장상사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옷 벗을 각오로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치고받고 욕을 하며 대들고 싶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있는 면전에서 보란 듯이 자재부

직원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직속상관인 내가 엄연히 있는데 단지 직책이 높다

하여 자재부 부하직원을 질책하거나 비아냥거리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과장이란 직책으로 이사대행을 하고 있는 것이 눈꼴사납다 해도

이런 상황은 타 부서라면 상상치도 못할 일들인 것이다. 비상식적인 언행을

버젓이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지나치니 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기에 참고 또 참았지만 폭발 직전까지 갈 때가 많았다.

 

때로는 도저히 참다못해 이제 그만하시지요 자재부에 관한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지고 알아서 할 것이며 잘못되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집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제에게 직접 하십시오 라고 항변이라도 하면 자재부 전체를

싸잡아 험담하니 참 가관이었다. 단순히 직책이 낮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대놓고 모멸감을 주니 하루하루 견디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업무를 잘 못해서 그렇다면 이해는 가지만 전무부터 몇몇 이사들이 똘똘 뭉쳐

노골적이며 전방위로 몰아 대니 마음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부하직원들에게 부서장으로서 방패막이되어 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미안하였다. 나 혼자에게 쏟아지는 화살이라면 기꺼이 견딜 수 있다지만 한마디로

힘없는 애비를 만나 애비 없는 자식같이 저리 마음고생하니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쌓이니 차라리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당장 대책도 없어 자연 망설여지게 마련이었다.

참자 또 한번 참아보자고 수 없이 끌어 오르는 울분을 삭이고 삭였다.

 

그렇게 힘들게 보내던 어느 날 퇴근 후 최계장과 술 한잔을 하다 음식점의 다른 테이블에 회식을 하던 기획실 팀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잠시 앉아 있으니 기획실 김대리가 우리 테이블로 와서는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며 김과장님 조금 있다가 다 끝나면 저하고 개인적으로 술 한잔 할 수 있겠습니까하는 것이다. 마음을 터놓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적은 없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다른 직원들과 함께 술자리를 몇 번 가진 적은 있었다. 그런데 둘이서 따로 한 잔 하자고 하니 뭔가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생각하고 최계장을 먼저 보냈다.

 

장소를 옮겨 김대리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때였다. 뜬금없이 김과장님 요즘 많이 힘들지요? 소문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를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기보다는 이사진의 견제로 인해 마음 고생한다는 것은 회사의 간부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라 요즘 그렇기는 해 때로는 참 더러워서 때려칠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가 많아  사실 최근에는 부쩍 그런 생각들이 잦아 하지만 그것도 쉽게 결정할 사항도 아니고 그냥 고민이 많아하니 김과장님 전무부터 이사들이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며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것이다. “아니 김대리 뻔한 것 아냐 과장 타이틀 달고 이사대행을 하고 있으니 배가 아플 것은 뻔하고 가끔 원자재 관련하여 회장님과 가끔 독대도 하니 그런 것이 눈에 가시처럼 보일 것이고 다 그런 아니겠어 하니 김대리가 자세를 바로 잡고 정색을 하며 김과장님 정말 순진하시네 그 양반들이 왜 그런지 정말 모르시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워 소스를 드립니다만 이것은 일급비중의 비밀입니다.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남자 대 남자로 약속을 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굳은 약속을 하고 나서 김대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충격과 서글픔이 뒤범벅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파면당한 전 자재이사의 비리를 조사할 당시 그 이사 개인만의 비리뿐만 아니라 부정한 돈의 연결고리는 의외로 회사의 고위 간부들이 거미줄 같이 엮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재이사가 주도적으로 자금을 빼돌렸고 물론 상당 부분은 본인이 착복했지만 입막음을 위해 전무,  공장장, 총무, 영업, 경리 등의 이사급들이 같은 배를 타고 조직적으로 횡령한 돈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이다. 자재이사가 횡령한 돈의 일정 금액을 주기적으로 돈을 나눠 받았고 그들끼리 수시로 만나 흥청망청 유흥점에 돈을 갖다 뿌렸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회장님이 알게 되었지만 다 파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본보기로 자재이사만 파면시켰고 원천적인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 나를 자재부로 보냈다는 것이다. 참으로 너무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너무나 허탈하였다.

 

그간의 비리에 대해 자숙하기는커녕 마약과도 같은 검은돈에 이미 깊게 맛을 들이 이사진들이 다시 그 짓을 하기 위해 필사적이며 조직적으로 나를 쫓아내려고 그랬다고 생각하니 가슴은 울분으로 가득하여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탁자를 내리 쳤다.

 

내가 자재업무를 맡으면서 자금 횡령의 부분에 대해 어느 누구도 노골적으로 말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이야기 자체가 되지 않으니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나를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최우선 목적이었던 것이다. 전방위로 나를 힘들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한마디로 그 자리에서 아니 아예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치졸하고 갖은 술수를 부리며 호시탐탐 향락의 부활을 꿈꿔왔던 것이다.

 

그간의 일을 생각하니 참았던 울분의 응어리가 소리 없는 눈물이 되어 뜨겁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김대리는 김과장님 힘들겠지만 끝까지 버터야 합니다.

그것이 회장님의 뜻이고 회사를 위하는 길입니다.’ 하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들은 회사를

장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었으니 오히려 나의 무기력함을 재 확인

할 수밖에 없는 참담함만 심정만 더 커졌을 뿐이다.

 

업무가 힘들어 그렇다면 좀 더 참고 노력하고 제대로 지시 관리하면 될 일이지만 이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니 어느 날부터인가 술이 취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을 하며 밤늦게까지 열심히 해 왔지만 날이 갈수록 회사에

출근하는 것 자체도 싫고 괴롭고 힘든 나날이 연속되었다.

정말 이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부쩍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막상 출근할 때나 술에 취해 늦게 집에 들어와 평온히 잠을 자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 그래 참자 또 참고 견뎌보자며 새롭게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조직적인 방해공작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내가 버티면 버틸수록 부하직원들이 갈수록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계속 근무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회사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점점 환멸이 느껴졌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결정한 다음 이제 사표를 제출한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그러니까 자재이사 대행으로 3년이 넘어갈 무렵 총무부에서 전화가 왔다. “김과장님 이번 다가오는 창사기념일에 진급자 발표가 있는데 차장으로 진급이 확정되었습니다. 명함을 새로 해야 하는데 변동사항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는 총무과 여직원의 전화를 받고는 불 꺼진 텅 빈 회의실에서 업무를 전폐한 채 또다시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눈물 배인 사직서를 썼다.

 

다음 날 총무과 담당 여직원에게 전화하여 이유는 묻지 말고 진급에 따른 어떤

것도 나에 대한 것은 모두 보류시켜 주십시오 자세한 것은 며칠 뒤에 알게 될 것

입니다. 대신 어느 누구에게도 이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는 이틀

 후 총무부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소문을 듣고 친한 간부들은 극구 만류했지만 마주치는 이사급 이상의 고위

간부들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회심의 미소가 번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다만 그동안 믿고 맡겨준 회장님께 너무도 죄송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무의미하였다.

 

며칠 후 게시판에는 여러 명의 진급 대상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총무부에서는 사직서 낸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차장 진급자인 내 이름도 함께 적어 놓았다. 게시판 앞에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여러 직원들의 축하인사를 했지만 그저 씁쓰레한 웃음을 보냈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짐을 챙겨 정문을 나서며 뒤 돌아보니 젊은 나이에 땀과 열정을 곳곳에 깊숙이

심었던 수많은 나날들이 주마등 같이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회사의 이곳저곳을 사진을 찍듯 가슴으로 보고 또 보며

못다 한 꿈을 다시 이룰 미지의 황량한 벌판으로 아쉽고도 무거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직장이란 것이 꿈을 펼치고 이루는 곳이기도 하지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꿈을 접어야 하는 곳이기도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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