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을 멈춰야 할 때/돌 위에 앉아

나의 숫돌

헤세드다 2014. 7. 18. 10:54

 

 

  --- 나의 숫돌 ---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였기에 기억 날 수 없는 나이에 보례(補禮) 영세를 받고 어릴 때부터 성당을 다녔지만 무척이나 가기 싫었다, 하지만 안 가면 야단을 맞을 것은 뻔하고 가뭄에 콩 나듯 가끔은 과자부스러기 같은 간식을 주었기에 그런 기대감에 다녔지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았다.

 

마흔이 조금 넘어서는 가톨릭에 심취하여 신앙인으로서 나름대로 교회 안팎으로 열정적으로 활동도 했고 부단히 노력도 했었다. 그 가운데 중학교 1학년을 맡아 3년간 교리 교사를 했었는데 아이들과 부대낀 그 시간이 가장 오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실 교리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단 한 번도 교리(敎理)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은 일주일에 토요일마다 한 번 오는데 한주간 학업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에게 굳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는 교리를 굳이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냥 다른 교리 교사의 눈을 적당히 피해 운동장이나 PC방 혹은 음식 만들기 등 그냥 한주간 쌓인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놀았다. 물론 준비한 교안이나 학습 보고서는 순전히 보고용이었는데 그 이유는 나 역시도 그 나이 때 지루하고 들어도 모르고 재미도 없는 교리 수업보다는 마냥 뛰놀고 싶었지만 꼼짝없이 잡혀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시간이 몸서리 나도록 싫었으니 내 마음이나 당시 학생들 마음이나 뭐가 다를까 생각하여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도 집이나 회사에서 틈이 날 때는 성서뿐 만 아니라 종교에 관련한 공부를 꾸준히 했었다. 그러던 중 언제가 내 자식들에게 신앙적으로 남겨줄 것이 뭣이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다 두 번의 성서 필사(筆寫)를 하여 하나씩 선물하리라고 마음 먹고 시작했다.

몇 시간씩 앉아 쓰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렸으며 때로는 손가락이 펴지질 않아 한참을 주무르기도 하며 부지런히 필사를 했다. 삼여 년에 걸쳐 한 번의 필사를 마치고 나니 펜을 잡은 손가락 부분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였고 조금의 공백기를 갖은 다음 두 번째 필사를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 즈음에 나의 전반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자아비판이라 해야 할까 뒤돌아 봄이 시작되면서 깊은 회의감(懷疑感)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근 일여 년을 매일 같이 텅 빈 성당에서 혼자 기도를 하거나 밤 늦게 성당 벤치에 앉아 생각하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처음에는 이렇게 방황과 갈등을 하는 제게 용기와 희망을 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하며 손 내밀어 주시기를 바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도라기 보다는 끝없는 자문자답이 되어 모든 것은 내 마음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면서 그간의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하기야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 아니란 것쯤은 익히 알고 있지만 너무도 나약하고 우매한 인간일 수 밖에 없으니 그냥 그렇게 기도할 수 밖에는 없었다.

 

방황과 갈등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결정을 하기로 하는 날 아무도 없는 본당 안에서 내린 결론은 마음 속에 있는 가식과 기만의 가면을 벗지 않고 그 상태로 계속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이나 내 스스로 위안을 찾기 위한 이 모든 것들은 가식과 기만으로 가득 차 허울만 신앙인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내 자신을 속여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싶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감추는 듯 다 보여주고 이해하지도 않으면서 이해하는 척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용서하는 척 싫은데도 좋은 척하는 나의 신앙생활은 거짓으로 얼룩져 종교란 것은 그저 사치에 불과했다.

그래서 스스로 속박하여 옭아매는 종교생활을 그만두고 자유로운 생활을 택했는데 웃기는 말이겠지만 한마디로 내 스스로 파문(破門) 즉 절교(絶敎) 하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 천주교 신자를 만나면 그만 냉담(冷談:차가운 대화 즉 기도로 이어진 하느님과의 관계가 식어짐)하고 다시 나오라고 하지만 별로 할말이 없으니 가볍게 웃어 넘겼고 정말 가끔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상대에게는 이런 마음의 고충이 있었다 라고 말을 하면 대다수는 아직도 마음 속에 자만과 오만으로 가득하여 그러하니 빨리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그럴수록 더욱 낮은 자세로 간절히 기도하라고 핀잔을 준다.

사실 그 말이 백 번 맞는 말이니 어떤 할말도 없지만 수 많은 고민과 고민 끝에 절교(絶敎)라는 막다른 선택을 하며 왜 그런 생각을 안 했으랴마는 이제는 다시는 어떤 종교든 믿을 생각이 없다.

성서의 구절 가운데 흔히들 비유를 하는 돌아온 탕자(蕩子)라는 내용이 있는데 난 돌아가지 않는 탕자가 되었다.

오만 방자(傲慢放恣)하고 오만 불손(傲慢不遜)하기 이를 데 없다며 그 어떤 심한 표현으로 손가락질 한들 내가 선택한 길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결국 두 번째 성서 필사는 이로 인해 십 분의 일 정도를 쓰다가 모든 것을 접고 말았다.

 

비록 가톨릭 신자로서의 모든 것은 접었지만 가톨릭(프로테스탄스)뿐만 아니라 불교,이슬람교,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종교철학에 대한 것들을 병행하여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공부해 나갔던 것은 종교의 진정한 본질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공부하면서 간혹 궁금한 것은 해당 종교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 질문도하고 궁극적으로 인간 삶에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며 인간은 왜 종교를 갖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하고 생각을 정리해 나갔었다.

어쩌면 종교관이 종교를 믿음이 아닌 학문의 한 장르인 신학(神學)으로써 공부하고 연구하는 형태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어 보거나 교의(敎義)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모든 종교의 공통 분모에 관련한 것이었다.

각 종교의 발생과 성장 그리고 전파 과정은 각각의 종교가 걸어 온 역사이니 출발도 과정도 다

르지만 전체의 틀에서 본다면 각 종교의 구원(救援)의 방법이라든가 교리(敎理) 그리고 외적으

로 종교 의례(宗敎儀禮) 방식이 다를 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귀착점은 모든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기도 한다.

어느 종교이든 양심을 버리고 비윤리적 비도덕적으로 살아가란 종교는 없다. 한마디로 나쁜 짓

하며 살아가라는 종교는 없으며 보편적인 종교라면 종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를 믿고 따르는 그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내 종교 네 종교 따질 필요가 뭐가 있을

?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옳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그 종교를 믿겠지만 그렇다고 타 종교를 사멸(死滅)시켜 할 종교로 적대시 하거나 얕잡아 하등종교라 폄하하거나 하는 것은 종교인으로 갖춰야 할 올바른 자세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종교 가운데는 사이비 종교도 무척이나 많은데 대게 사이비 종교의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은 종말을 앞내세우거나 교주가 현존하는 신()임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이비 종교인 것이다. 종교란 단어를 붙일 것도 없이 그냥 사이비다.

 

최근에 종교간의 대화의 물꼬가 터여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는 이런 풍조들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는데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각자 믿는 종교는 달라도 종교가 존재하는 궁극적 목적은 같다고 생각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바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사상적 방향과 같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 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요 깊이 있는 철학을 가진 것도 없지만 지금까지 종교에 관한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들과 종교관을 적고자 하니 가볍게 받아드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종교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자면 추측하건대 종교가 발생된 계기 즉 원시종교의 태동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일 것이라 판단한다.

첫째는 인간의 한계성인데 인간은 여느 동식물과 같이 한시적인 생명체이다. 수명이 짧던 길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으니 영원불멸처럼 보이는 태양이나 달.별 뿐만 아니라 산,바위 나무 등 변함없이 영속되는 자연물들은 자연스레 경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런 영원불멸의 자연물을 주관하며 시간마저 관장하는 절대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계성이라는 것은 생명의 한계인데 지금도 주변에 남아 있는 토속신앙에는 아직도 나무나 돌 등을 신성시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명력 보다 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는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하는데 여느 동물도 생각을 한다, 그러나

확연한 차이점은 제사를 지내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사후세계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며 죽은 후 다시 태어나 혹은 영혼으로도 영원히 살고픈 본능적 욕망이 있다. 물론 심판이라는 것이 있어 절대자의 뜻에 어긋난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분명 벌이 따른다고 믿기에 신의 앞에 절대 복종을 하며 신의 뜻을 거슬리지 않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원시 종교의 특징 즉 그 당시 믿었던 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사랑과 자비보다는 징벌적 요소가 강하여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 같다.

 

유사이래 수 많은 종교가 생겨났다 소멸되기도 하고 지금까지 현존하는 종교가 있지만 지구상의 수 많은 종교 가운데는 아직도 원시종교의 형태를 갖고 있는 종교도 무척이나 많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종교로는 그리스도교,불교,이슬람교,힌두교,도교 등 신자수가 많은 종교도 있지만  소수 종족이 믿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수 많은 종교가 지구상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종교(대표적 종교)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고등종교가 되었지만 종교와 인간의 본질적 관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인간의 한계와 본성은 변할 수가 없기에 고대 원시인이나 현대인이 종교를 믿는 이유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원시종교와 고등종교와의 차이는 문명이 발달되면서 자연히 사상과 철학이 정립되어 교의(敎義)나 교리(敎理)가 체계화 되었을 뿐 인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에 대한 부분을 서술하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타 종교에 대한 부분은 언급할 이유도 없거니와 하물며 현재 아무런 종교를 믿지 않으면서 종교 전반에 관련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분명 상당히 무례하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느 종교를 망라하고 대부분의 종교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것으로 어느 종교인이든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종교내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말하기도 싫은 아킬레스건 같은 내용일 수도 있다

 

아마 이삼 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집 부근에 불자(佛者)이신 지인 한 분계신데 평소 바쁜 가운데도 사경(寫經)은 물론이오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하고 힘든 생활고 속에서도 늘 웃으며 깨달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시는 참 종교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분이 계셨다.

술도 같이 한잔 하면서 가끔은 종교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했는데 한 번은 그 분이

몸 담고 있는 한국불교대학 관음사에서 6개월간 특강을 하는데 수강하면 아마 도움이

많이 되리라 생각해서 권하니 한번 강의를 듣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기에 흔쾌히 신청하였다.

 

강의 교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으로 제목 그대로 끊임 없이 수행을 하면 마음 속에서 어떻게 믿음이 일어나며 그 충만 된 자비심은 자연스럽게 중생을 구제하는 대승적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 불자도 아닌데 간단히 요약한다는 것이 그렇기는 하지만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득도의 길을 걷는다는 내용인데 강의에 대한 정보를 조금 늦게 알게 되어 첫 수강 시간 때는 이미 한달 정도 진도가 진행된 상태였고 생소한 불교 용어 때문에 처음 한 달 가량은 이해하는데 참 어려움이 많았었다.

하지만 강론 하시는 스님(대륜스님)의 탁월한 가르침에 생각 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었고 두 어 달 지나자 다소 어려운 점은 있었지만 진도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감탄한 점은 수행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섬세한 심리적 변화 과정(단계)을 글로 표현했다는 것이며 그 난해한 내용을 적절한 예를 들어가며 수강생이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하시는 대륜스님의 열정과 깊은 학문적 지식 그리고 경건한 마음이 절로 들 정도의 수도자로서의 자세에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하고 싶을 뿐이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비록 한 때는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였지만 내용면에서는 심적 변화 즉 수행과정에서의 깨달아 가는 단계에 대해 가톨릭에서는 그렇게 표현된 용어가 없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든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음직한 심적 경험들 가운데 유사한 부분이 많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갈구하고자 하는 부분이었기에 비록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어도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종교에 대한 믿음을 정리한 내가 불자가 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사상과 철학적 측면으로만 들을 수 밖에 없어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설 수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던 점은 시인할 수 밖에 없다. 

종강 이후 집에서 시간을 따로 내어 그간 강의 받았던 대승기신론을 처음부터 재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종교 즉 믿음을 떠나 학문적으로 마음에 깊이 와 닿은 것이 많았던 것은 수행해 나가는 방식이라 해야 할까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상당부분 맞아 떨어진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바라 본 불자들의 신앙생활이나 전에 가톨릭 신자로서의 생활이나 공동체 안에서의 모습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공동체라는 것이 어차피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생활이니 어쩌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종교이든 분명한 것은 종교인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은 그 종교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 종교인이라 할 수 없고 종교인은 믿어야 한다지만 믿음에도 여러 종류가 분명히 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무조건 이유 없이 믿는 맹목적 믿음과 종교의 본질과 교의를 잘 알고 내면을 끝없이 수련하는 수도자적(修道者的)인 믿음 그리고 믿기는 믿지만 너무 이성적(理性的) 사고가 앞서 무엇이든 합리성을 따져가면 모든 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종교 교의를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는 나 홀로 믿음 등 형태상 여러 류의 믿음이 같은 종교생활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믿음이 가장 올바른 믿음이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런 믿음이 없는 내가 어떻다 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니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인 것 같다.

 

통상적으로 종교인들이 공동체 생활 속에 선입견 때문에 발생되는 몇몇 폐단에 대해 느낀 점이 있는데 먼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종교 입문의 우선 순위를 내세우는 신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 생활의 경력을 앞세운다는 것이다.

종교는 어떤 종교이든 근본적으로 진리의 깨달음인데 시쳇말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니 당연히 영적(靈的)으로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처음 입문한 사람이나 자신보다 후에 입문한 신자를 낮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수 십 년 아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신자는 깨달은 사람이고 금방 입문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무지한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은 일부 종교인들의 잘못된 편견이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겠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교에서 오래 신앙생활 한 신자는 처음 입문 자나 후에 입문 자 보다 그 종교에 대한 지식이나 종교의례를 좀 더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굳이 종교인이 아니라 해서 깨닫지 못할 것도 없고 오래했다 해서 당연히 깨달았다고 할 수도 없으며 금방 입문한 사람이라도 한 마디만 듣고도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진리의 깨달음에는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종교를 갖고 있던 없던 종교가 달라도 신앙 생활의 길고 짧음도 평신도나 수도자나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의 업무와 같이 오래 근무하면 경험이 풍부하여 일을 잘하고 신입사원은 서툴러 아무것도 모르니 실수가 잦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회통념의 잣대를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대어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 아닌 말로 회사 생활도 빨리 적응하는 사람이 있고 오래 근무했다 해서 모두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 하물며 심오한 종교생활은 오죽하랴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후세계(死後世界)를 믿는 것은 물론이요 하물며

믿는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무교)라고 하는 일반인도 사후세계 마저 부인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 사후 세계라는 것이 무언가 이승의 삶에 대한 심판이 따른 다는 것쯤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텐데 어느 종교의 경전에도 사후 심판에 있어서 먼저 입문한 순서나 경력이

오래된 신자를 특별 우대한다는 글귀는 단 한 줄이라도 본적이 없다. 만약 그런 글귀를

인용한다면 그건 분명 사이비 종교일 것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입문의 우선 순위를 따지는 어리석음을 빨리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종교 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버리는(종교를 떠나는) 여러 부류 가운데 특히 초보 입문자가 가장 많은 까닭은 입문 당시 나름대로 종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가 이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면 그 충격으로 종교 생활을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보 입문자가 간과한 것은 종교란 그물을 걷어내고 나면 일반 사회생활과 다를 것 하나도 없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데 종교 자체가 갖는 선한 그물만 보고 그 아래 있는 모든 신자들도 당연히 천사와 같이 착하고 양심적일 것이라는 나름대로 환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대가 큰 만큼 당연히 실망도 큰 것이다. 아직 신앙적으로 충격(마음의 상처) 흡수할 면역력을 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작은 충격에도 데미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충격을 주는 사람은 가장 믿었던 가까운 신자가 가장 큰 충격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또 수도자 때문에 혹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답을 찾지 못해 타 종교로 바꾸는 신자도 더러 있기는 하다.

어찌 되었던 종교를 불문하고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신자들의 이유 가운데 생업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것 말고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신자들이 주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신앙 생활을 그만 두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많은 것 같다. 한마디로 종교가 싫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싫은 것이다.

 

이렇듯 비 종교인이 전교 혹은 포교 등으로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은 대게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 보다는 먼저 입문하였으니 혹은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니 신앙심도

당연히 깊을 것이고 기본적인 인격적인 측면은 물론 모든 면에 본받아야 할 신자일 것이라는

다소 환상을 갖는 사실이며 반대로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든 면에

우위에 있으니 자신이 알고 있는 알량한 종교적 지식을 무슨 대단한 영적 신앙인 냥 자꾸만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 하며 외면해서도 안될 것이며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해서도 안 되는 참 어려운 부분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는 개개인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고 일반적으로 종교인이니까 당연히 착하다 양심적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어떤 신자는 오히려 종교의 테두리 안 즉 같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수 없이 기회를 주는 것이지 만약 사회 생활이라면 상종도 못할 신자도 더러 있다. 그런 신자에게는 오히려 종교가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다. 아닌 말로 같은 신앙인이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에서라면 벌써 사단(事端)이 나도 수십 번 났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평소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각종 봉사를 열심히 하며 열성적으로 종교활동을 하는 신자나 배움이 많아 그 종교에 대한 지식(교리적)이 많으면 보통 영적으로 높다고 판단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는 것은 종교란 가림 막 아래서는 그렇게 보일런지도 몰라도 막상 자신에게 어떤 불리한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의 평소 성품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겉으로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포장되어 있는 듯해도 자신의 자존심 상할 어떤 상황이 되면 수면 아래 눌려 있는 성품이 그대로 폭발되고 마는 것은 시쳇말로 제 버릇 개줄까라는 말이 있듯 주변을 의식해서 혹은 종교 안에서 자신의 위치나 입장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외적으로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 내적으로 수행을 한 것이 아니며

특히 이런 분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도 권위의식이 강한 분들로 종교 내에서 직책 맡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대체적으로 양심적인 사람은 종교를 믿지 않아도 착하고 몹쓸 사람은 어떤 종교를 믿어도 매한가지이다.

종교가 천성을 바꿔주지는 않지만 수행을 통해서 천성을 다스려갈 뿐이다. 사람의 천성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종교생활은 누구 때문이나 누구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면 출발점부터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종교생활 즉 신앙생활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 즉 끝없는 자기 수양의 터전이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야 하는 것이 옳다.

물론 이렇게 말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존경하는 수도자인 정신적인 멘토 두 분이 계신데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언제나 마음 속에 두 분의 말씀을 되새긴다. 한 분은 김상렬(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이고 또 한 분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마음에 남기신 한국불교대학 관음사의 대륜스님이다.

두 분의 공통점은 우선 외견상 키가 자그마하고 마른 체격이나 외모보다는 모든 면에 있어 열정적이며 깨달음은 반드시 교회나 절이 아니라 삶의 주변 생활 있으니 생활 속에서 깨닫고 실천하는 종교인이 되라고 늘 힘주어 역설(力說)하시는 모습을 언제나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비록 종교가 다르기는 하지만 진리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종교인들은 처음 입문 시에 각자 가슴 속에 숫돌을 하나씩 들고 들어가는데 숫돌이라는 것이 오래 되었다 해서 자동으로 닳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모난 것들을 끊임없이 갈고 닦지 않고서 어찌 그 숫돌이 그냥 닳아지길 바랄 수 있을까? 삶 속에서 수많은 고행을 통해 심신을 끊임없이 수련하며 정진해야만 닳을까 말까 하는 것을 시간이 흘렀으니 혹은 이만큼 했으니 자연 닳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것이다.

 

성서에도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탓한다는 구절이 있듯 남의 숫돌은 잘 보이지만 내 가슴의 숫돌이 얼마큼 닳아는 지는 알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자신의 숫돌은 본인이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숫돌은 갈아 보지도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초기부터 잃어버렸지만 그 숫돌을 다시 성당에서 찾고 싶지는 않다.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이제 갈고 닦아야 할 숫돌은 종교의 테두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아직도 숫돌을 제대로 가는 방법을 몰라 감히 집어 들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한 번도 갈아 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다 여정이 끝날 수도 있겠지만…

 

끝으로 헛소리 한마디 적을까 한다.

창조론을 교의로 하는 종교 신자가 이 글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미친 놈 취급을 하겠지만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창조를 하였다고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신을 창조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도 해본다,

만약 인간 삶에 신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다고 모두가 확신한다면 윤리나 도덕도 양심도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저 동물의 왕국처럼 약육강식의 세상 즉 힘센 놈만 권력을 갖고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그런 세상일 테니 인간세계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신이란 존재가 반드시 필요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그냥 그렇게 생각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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