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드다 2017. 1. 16. 11:00




--TV 나오지 않은 하루 밤--

       (2017년 1월 26일 MBC 여성시대 방송 원고)

자석에 이끌린 듯 순전히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아 눌렀다. 퇴근 후 운동을 갔다가 저녁 7쯤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TV 리모컨을 쥐고는 전원을 켠 것이었다. 그런데 TV 화면이 켜지고 채널을 돌리려 했으나 웬일인지 리모컨이 먹통이 되어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생각하며 화면을 보니 상단부에 작은 글씨로 인터넷 접속 불안정이란 자막이 나를 보라는 듯 계속 깜박거리며 윙크를 날리는 것이다. 그래서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처럼 화면상태가 지속될 경우 해결방법을 4단계로 안내해 놓았다. 그래서 안내문구에 따라 몇 번이고 시도해보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할 수없이 마지막 단계인 고객센터로 직접 전화를 하여 상담을 하였더니 옥외 회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서비스 직원이 시간이 늦어 갈 수 없고 내일 빠른 시간에 예약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 저녁부터 내일 수리할 때까지 TV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집사람이 외출했다가 들어왔기에 먼저 문제가 생겨 오늘 밤은 TV를 볼 수 없게 되어버렸어 어떡하지?”라고 했더니 뭔가 확신에 차 자신 있다는 듯 ! 그거 내가 해결하는 방법을 알아하면서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이미 수 차례나 시도한 set-top box(신호 변환기) 전원을 껐다가 켜는 것이다. 하지만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가만히 지켜보다가 에이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이미 몇 번이고 해봤지만 도저히 안되더라고 그래서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지 그랬는데 지금은 수리가 안되고 내일 되어야 한데하니까 그때까지도 영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하지만 혹시 안방에 있는 TV는 나올 수도 있을 거야하며 방으로 들어가서 리모컨 스위치를 이리저리 작동시켜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우리 집 TV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이므로 모뎀(MOdulator and DEModulator)에 신호가 잡히지 않으면 집안에 몇 대의 TV가 연결되어 있던 무용지물이란 것을 아마 집사람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드라마를 보겠다며 일부러 시간을 맞춰 서둘러 귀가했는데 당장 볼 수 없다는 것은 고사하고 저녁에 무얼 하고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되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우리에 갇혀 스트레스 받은 동물마냥 안방과 거실을 계속 왔다갔다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고민은 집사람뿐만 아니라 당장 내 문제이기도 하였다. ‘! 이제 이 긴긴밤을 무얼 하고 보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머리 속에 당장 떠오른 것이 없었다. 그간 TV를 보면 지내는 것이 습관이라 TV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뎀이나 set-top box 스위치를 몇 번이고 또다시 껐다켰다를 반복하였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TV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시쳇말로 공황(恐慌)상태에 빠진 것 같이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니 서로가 뾰족이 할 말도 없었고 집사람은 안방과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계속 서성거렸다. 그러다 30여분이 지나자 집사람이 손바닥을 탁 치더니 ! 우리 이렇게 있지 말고 영화나 보러 갈까?”하는 것이다. 순간 그렇게 할까라고 생각했지만 망설여졌다. 날씨도 춥고 다소 늦은 시간이라 외출한다는 것이 귀찮아서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나가지 않겠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집사람은 입을 삐죽이며 이내 안방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거실 쿠션에 기대어 혹시 모뎀에 신호가 다시 잡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집사람이 갑자가 안방에서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 좋은 생각이 났어 우리 라디오를 듣자하며 거실에 있는 라디오를 켜고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그리 선호하는 방송 내용이 아니었는지 이마저도 5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에이 들을 것 없네하고 라디오를 끄고는 게임이나 해야지하며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속으로 원맨쇼(one-man show)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기는 하지만 TV를 못 본 시간이 불과 한 시간도 안되었는데 참으로 심심한가 보다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 나는 이제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을 하겠다던 집사람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풀이 죽은 모습으로 거실을 나오며 ~이 인터넷이 안되니 와이파이(Wi-Fi)가 잡히지 않아 게임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잖아 지금 남은 데이터(data) 용량이 얼마 되지 않으니 이마저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 정말 이제 어떡하지? 뭘 해야 하나?” 하며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러다 또다시 거실과 주방을 잠시 서성이다 뭔가를 기대하며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쳐다보았지만 아무 응답 없자 납덩이를 지고 가듯 무거운 발걸음을 안방으로 돌렸다.


그렇다. 당장 나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아무 생각 없이 얼이 빠진 냥 멍히 있는 상황이니 뭐라고 대꾸할 입장이 아니었다. 초저녁이라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는 것도 무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가만히 앉아서 하릴없이 벽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민거리는 새벽이 문제였다. 평소 새벽잠이 없어 자정 넘어 잠을 자도 늘 새벽 3-4시쯤부터는 수시로 일어나 출근 전까지 토끼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그때마다 그 무료한 시간을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 밤은 그것이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집사람도 그 이후로는 안방에서 무얼 하는지 더 이상 나오지 않아 거실의 전등을 소등한 채 쿠션에 몸을 기대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간 TV 시청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보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참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구나그동안 이렇게 TV 시청에 중독되어 저녁 생활을 무의미하게 보내면서 왜 한번도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 한심스러움과 무력감을 철저히 체감하며 한편으로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핑계이겠지만 6-7년 전부터 노안(老眼)으로 저녁에 책을 보면 눈이 너무 피곤하여 책과는 거리를 두었다지만 역시 핑계는 핑계일 뿐이다. 속으로 이제 달리 방법도 없고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상상과 공상의 바다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자며 깜깜한 거실 천정을 그저 멍하니 응시하였다.


그러다 조용히 눈을 감으니 한동안 마음 에 잠시 잊고 있었던 걸어온 뒤안길이 서서히 펼쳐졌다. 앞만 보고 뛰어왔던 격정의 나날 속에 사랑과 웃음. 이별과 눈물 등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기를 반복되었다. 특히 행동이나 말로 인해 실수하고 잘못했던 일들로 뭉친 후회의 덩어리가 주먹 돌처럼 뒤안길 곳곳에 즐비하게 박혀있었다. 그렇게 머리 속은 두서없이 지난 흔적과 걱정스레 다가오는 그림들로 얼키설키 뒤범벅되어갔다.


그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어김없이 눈이 뜨여 시계를 보니 3시를 조금 넘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혹시나 하고 TV를 켜보았으나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베란다에 나가 새벽 차가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 한 모금을 진하게 내뿜으며 하늘에 초롱초롱 열려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별생각 없이 무심히 하늘을 응시하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니 어언지간 깊고 은밀한 깊은 밤바다에 푹 빠져버렸다.


별들이 소근소근 대며 나누는 은밀한 밀어(蜜語), 노오랗게 영글어 가며 어두운 뒷골목 사이사이에 새어 나오는 가난한 삶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기울이는 달빛, 밤하늘 한 구석에 쌓여지는 뒷담화들을 유유자적 닦아가는 흰구름, 이 모든 것을 단상에서 지휘하듯 바지런히 몰려왔다 몰려가며 좌충우돌하는 차가운 밤바람을 실컷 맛보게 되었다. 그렇게 까만 벽시계와 함께 수 차례 거실과 베란다를 오가다 보니 어느새 새벽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떠났고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명을 맞이하였다.


이제 씻고 출근 준비나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집사람이 뜬금없이 스케치북을 들고 나오더니 TV 모니터 앞에 펼쳐 보이며 작품이 어때?”하여 보니까 올 가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모은 빨갛고 노란 단풍잎을 스케치 북에 풀로 붙여 놓았는데 보기에 제법 그럴싸하였다.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며 제목이 뭘 것 같아?” 하고 재차 묻는 것이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는데하니까 다소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그냥 가을이야 가을…”하고는 아침을 준비하려는 듯 주방으로 휙 사라졌다. 순간 ! 역시 사람은 창조의 동물인가 보구나집사람은 그 따분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그러한 걱정은 오히려 기우였고 그 시간에 작품 아닌 작품을 만든 것이다. 나 또한 많은 생각을 하며 보낸 하룻밤이었지만 집사람이 무료한 밤에 야심 차게(?) 만든 가을이란 작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렇다. 요즘은 매일매일 TV나 컴퓨터 혹은 스마트 폰 등 시각적(visual) 매체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대다수가 여기에 대해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며 어쩌면 나 또한 이런 손쉬운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손과 눈은 이러한 기기(器機)들과 잠시라도 멀어지면 불안감에 휩싸일 정도로 심한 강박증에 빠져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렇게 갈수록 원초적이며 자극적인 매체에 종속화, 노예화 되었음을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동안 귀찮다 바쁘다는 등등 여러 핑계로 책을 멀리하거나 스쳐가는 작은 속삭임들을 외면하며 마음의 양식을 살찌우는 것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가끔씩 아니 의식적이라도 이런 매체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고 귀 기울이는 시간 할애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TV를 없이 하룻밤을 보내며 느낀 여러 생각들 그리고 집 사람이 밤새 만든 가을이란 작품을 보며 그간 상상과 창작의 그림판을 덮고 무미건조하게 보낸 시간들에 대한 반성을 해본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한편으로 이런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거리를 두어야 할 기계(TV)를 통해서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