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제조업의 자화상
--3D 제조업의 자화상--
섬유관련업에 20년 넘게 종사해 오면서 격세지감이라 해야 할까 제조업의 현장 분위기가 예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풍경에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여러 가지로 심히 우려가 된다.
자료에 의하면 대구지역에 처음으로 염색 공장이 들어선 것은 1907년 일제시대였고 1950년 후반까지 소규모 가내공업의 형태이기는 해도 많은 공장들이 난립할 정도도 활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경인지방과 부산지역은 부흥기를 맞았으나 상대적으로 대구 지역은 조금씩 쇠퇴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1970-80년에는 우리나라가 경제 개발에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던 때로 궁핍한 시골 생활을 탈피하고자 취업과 교육 등등의 목적으로 돈벌이를 위해 도시의 공장으로 수많은 농촌의 젊은 이들이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그 대상 연령이 지금의 50대와 60대의 나이로 듣기 거북하지만 그 당시에는 공장에 근무하는 젊은 근로자들을 공돌이 혹은 공순이라 폄하하여 불렀다.
대구 서구 비산동에 위치한 비산 염색공단이 조성된 시기가 1970년도 말경이니 벌써 40여 년 가까이 되었다.
1980년도 초에 대구에서 군생활을 할 때 비산 염색 공단에 근무하는 지인이 있어 외출 시 가끔 이 공단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세상살이 어찌 앞날을 알 수 있으랴! 그때만 하더라도 대구가 고향도 아니고 전공(專攻)도 무관하였으며 전혀 연고가 없었기에 이 비산 염색공단은 그렇게 머리 속에 잠시 기억으로만 남아 쉽게 잊히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후부터 지금까지 이 곳이 삶의 주 무대가 될 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으랴
친구를 만나려 비산 염색 공단을 가기 위해서는 시내버스를 타고 대구 북부 정류장에 내려 바로 옆에 있는 상가 담벼락을 끼고 폭이 2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을
2-3분 걸어가면 조금 넓은 2차선 도로가 나온다.
두서 갈래의 200미터 정도 되는 이 도로 양편에는 작은 식당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드문드문 주택이 있는 지역으로 10분 남짓 정도만 걸으면 바로 비산염색
공단이 위치하였다.
당시 그 좁은 골목과 도로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아 밤낮으로
북적거렸다. 특히나 출퇴근 시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복잡하여 가만히 서
있어도 인파의 물결에 떠밀려 갈 정도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가가 밀집한 2차선 도로를 따라 공단까지 거리 양쪽에는 대부분이 식당이었고
도로 옆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하였다. 식당과 포장마차에는 이 곳을 찾는 공단
근로자들로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었다. 시쳇말로 공돌이 공순이들의 집합소같이
시끌벅적하며 활기가 넘쳐났던 곳이다.
그 시절 전국 여느 공단지역의 풍경도 마찬가지였지만 근로자들은 대부분 젊은 아가씨나 혈기 왕성한 총각들로 박봉에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가격이 저렴한 공단 인근 식당과 포장마차는 이들의 은밀한(?)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명 굴뚝산업이란 제조업이 3D업종으로 분류되어 애물단지 같은 산업으로
전락함으로써 염색 관련업 역시 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섬유 관련 업종뿐만 아니라 3D업종으로 분류된 여타 제조업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처음 비산 염색공단이 조성되어 어느 정도 활성화 시기를 맞던 때와 비교하면 가동하는 입주 공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인근 공단에도 그 많던 염색 공장들이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공단 입구에는 멀리서도 눈의 띄게 큰 글자로 ‘한국의 밀라노’란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적어 놓았지만 말이 좋아 그렇지 실상은 겨우 명맥만 근근이 유지해 나가는 상황이다.
이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평균 연령이 50대로 이 업종의 일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아예 없으니 언젠가부터 그 빈자리를 외국인 근로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간혹 드물게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업종의 기술을
배워서 꿈을 키우려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군 병역 특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란 거대한 쓰나미는 3D 업종을 집어삼켜 고령화 공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곳에 종사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국적도 참 다양하다.
필리핀, 방글라데시아,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중국,우즈벡, 등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가끔 점심시간에 거래처 식당에 가 보면 자국 사람들끼리
모여 삼삼오오 식사를 하는데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여 격렬한 토론을 하는 듯
하다. 의당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지만 짧은 점심시간의 만남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듯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떠니 식당이 아니라 시장통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90년도 후반까지만 해도 대부분 젊은 남성 외국인들이 주축이었으나 지금은 20대의 젊은 아가씨들도 무척 많이 근무하고 있다.
초창기 이들 외국인은 공장에서 단순한 보조 역할을 하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염색의 주 기계라 할 수 있는 염색기를 돌리는 것은 물론이오 웬만한 공정의
기계는 죄다 가동하고 있는 숙련공 즉 기술자인 것이다. 어쩌면 간부를 빼고 나면
외국인 근로자들의 손에 염색과 검사와 출고를 의존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들이 동시에 이 곳을 떠난다면 당장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생산량을 대폭 축소해야 정도로 이들에 대한 의존율이 상당히 높은
것이 현실이다.
몇 달 전 우연히 북부정류장으로 향하는 예전의 그 좁은 골목을 지나가 보니
골목은 그대로였으나 오가는 인적은 고사하고 그 많던 식당은 문이 닫혀 있었고
간혹 문이 열려 있는 곳은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식당
간판은 무슨 글자 인지 모르는 외국어로 되어 있고 그곳에는 이 공단이나
주변 공장에서 근무하는 외국인들이 자국인들을 상대로 음식과 식품을 팔거나
그들만의 모임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출품 중 전자, 자동차, 선박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중국산
공산품이 제품의 품질적인 측면에서 턱밑까지 쫓아오거나 일부는 이미 추월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량의 값싸고 질 좋은 중국산 제품이 물밀 듯 밀려오니 우리 제조업이 어떻게 버티어 낼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우리 제조업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인적자원과 R&D (research and development)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D업종으로 분류된 제조업의 상황이 거의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환경도 열악하고 급여도 적고 미래도 불투명하며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도 소홀하니 청년들이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며 이런 악순환으로 사양산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투자는 등한시하고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한 결과로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염색 산업 또한 이런 상황이니 향후 10년에서 15년 뒤에는 감히 전망하건대 경영자나 주요 간부 몇 사람을 빼고는 실지 공장 기계를 가동을 하는 근로자들은 전부 외국인으로 바뀌거나 아예 사양산업으로 전락되어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상황은 무척이나 심각하다.
20여 년 전까지는 그나마 염색산업이 활성화 되는 듯 했으나 그 이후 ‘올해 상황이 염색 산업이 생긴 이래 최악이다’라는 말을 매년 하며 지금까지 버티어 온 것 같다.
그러니 지나고 보면 매년 최악이라 생각했던 한 해전이 당년(當年) 보다는 낫다고들 하니 이제는 후년(後年) 대한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며 이런 추세로 가면 언젠가는 도미노같이 줄 도산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오늘도 비산 염색 공단을 이리저리 다니며 공장 안에 분주히 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습과 지난날 북적거리던 거리의 풍경이 오버랩 될 때면 나도 몰래 씁쓸한 웃음을 떨칠 수 가 없다.